"전화번호는 깜빡해도 대사는 줄줄 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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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마련된 SBS 주말드라마 '대망'촬영현장.

젊은 연기자들의 얼굴을 붉게 만드는 PD의 쇳소리나는 NG사인도 이 사람만큼은 비켜가는 듯하다. 배우 장인환(84·사진). 대한민국 연기자 중 최고령이다.

그는 이 드라마에서 재영(장혁 분)을 따라가는 담배재배 농민들의 촌장격인 양노인 역을 맡고 있다.

NG사인이 나면 좌중은 긴장이 풀려 웅성대지만 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다. 그저 조용히 서서 다시 '스타트'를 기다릴 뿐이다.

"대사 한번 바꾸거나 잊어버린 적이 없어요. 연기도 더 요구할 게 없죠. 대단한 정신력 아닙니까."

까다롭기로 소문난 김종학(51)PD의 말이다.

"이상하지. 내가 휴대전화 번호는 잘 잊어버려도 대사는 절대 잊어버리지 않아. 직업의식이겠지."

1918년 서울 북아현동에서 태어나 19세 때 연극을 시작했으니 어느새 그의 무대인생도 65년째다. 일제시대에는 만주벌판을 돌아다녔고 해방 이후에는 평양에서 연극단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1·4후퇴 때 배를 타고 내려왔지. 장동휘·허장강·김승호 등 친구들은 이제 배고픈 연극 그만하고 영화 하자고 하더군. 그래도 난 연극을 버릴 수 없었어. 배가 아파도 무대에만 서면 감쪽같이 낫는거야."

황금좌·청춘좌 등 당시 극단이 배우들을 먹여주고 재워준 덕분에 그는 아무 부담없이 연극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은 이렇지만 50년 전엔 꽤 유명했어. 연극판에서 주연배우 장인환이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그가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된 것은 김종학 감독과의 인연 때문이다. '조선왕조 5백년사'를 할 때 "드라마에도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브라운관에 얼굴을 내민 게 방송출연 시작이다.

그 뒤로도 MBC 창사특집극 '명태'나 베스트극장 '개같은 나의 인생'등 드라마와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에도 출연해 천연덕스러운 노인역을 열연했다.

칠순잔치를 하면서 매운 것 짠 것 다 끊었다는 장옹(翁)은 얼마전 담석 때문에 한번 쓰러진 뒤 담배도 딱 끊었다. 그래도 반주 한잔이 있어야 수저를 뜨는 것은 여전하다.

그는 자신의 건강비결이 연기를 계속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연기를 하는 이유는 심심해서 그래. 경로당엔 죽어도 가기 싫거든. 이런 데 나와 연기하고 또 후배들과 농담하고 그러다 보면 나도 젊어지는 것 같아. 게다가 출연료도 생기잖아."

그의 가족은 단출하다. 52세 때 낳은 늦둥이와 부인이 전부다. 지금 33세인 아들 장진씨는 영화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다. 감독 장진과는 다른 인물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여전한 '현역'으로서, 그는 요즘 배우들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귀엽고 장하고 다 좋은데, 내 맘에는 맞지가 않아. 죽을 때까지 연기만 하겠다는 다짐이 안 보여. 난 무대에 올랐을 때 저 막을 덮고 죽으리라 맹세했거든.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좀 하다 시집이나 가야지, CF로 돈이나 벌어야지 그 생각뿐인 것 같아."

제천=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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