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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플라스를 추억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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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지난 11월 초 '그랑플라스 모임'이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이 모임은 1970년대 중반에 벨기에 대사와 유럽공동체(EC) 대사를 역임했던 송인상 현 능률협회장을 중심으로 당시 대사관에 근무했던 분들과 유관기관 사람들이 만든 친목모임이다. 송회장 내외분과 강신조 전 의원, 고두모 전 대상 회장·김기인 전 관세청장·김만기 삼천리출판사 대표·민태형 전 소비자보호원장·박종상 전 대사·변도은 전 한국경제신문 주필·엄길용 전 대우사장·이태영 예비역 소장·채재억 전 생산성본부 회장·정영숙 고 권동만 대사 부인, 그리고 본인 등이 주로 모여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하곤 한다. 이날 모임의 화제도 단연 브뤼셀의 명소인 그랑플라스에 대한 회상이었다. 70년대 1차 석유위기의 와중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한국 경제를 걱정하며 우리들은 열띤 토론으로 밤의 그랑플라스에 열기를 더하곤 했다. 한 잔의 하우스 와인과 더불어 깊어갔던 그 아름답던 그랑플라스가 바로 나의 와인 역정의 출발점이다. 요즘도 와인 글라스를 앞에 두면 빅토르 위고도 예찬했던 그랑플라스 광장의 아름다운 야경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내가 75년 여름 한국은행의 사무소 개설을 위해 브뤼셀에 부임했을 때 예상대로 많은 난관이 있었다. 언어와 문화라는 짧은 기간에는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장애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어느 시대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업무에는 인간관계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EC와 벨기에 중앙은행과의 원활한 협조를 위한 첫걸음으로 몇분을 부부동반으로 늦은 저녁의 정식 만찬에 초대했다. 장소는 그랑플라스의 한 모퉁이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당시 브뤼셀에선 꽤 알아주는 곳이었다. 레스토랑의 유명도나 음식만 보면 나무랄데 없는 만찬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하게 느껴진 것은 주요리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네시간에 걸친 만찬이 무사히(?) 끝나고 귀가한 나는 적은 예산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저녁 자리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이날 벨기에 중앙은행의 대외담당 책임자를 찾아가 전날 저녁의 분위기에 대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그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하고 예상 밖이었다.

해외 주재 경험이 많은 한국 대사관 직원이 나에게 추천해주었던 와인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정식 만찬 메뉴와는 균형이 너무나 맞지 않은 와인이 곁들여지면서 저녁 자리에 실망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던 것이다. 당시 나는 소믈리에에게 와인의 선택을 부탁하는 기초적인 상식조차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동양의 은행원이 그런 것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고 배짱좋게 끝내기에는 스스로의 무지가 창피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 길로 벨기에 중앙은행을 나와 언덕길을 뛰다시피 내려와서 브뤼셀 중심가에 있는 미국 서점을 찾아갔다. 그리고 점원의 도움을 받아 영국의 와인 및 음식협회(Wine and Food Society)에서 간행한 버건디(Burgundy)와 보르도(Bordeaux) 와인을 설명한 두 권의 책을 구입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시행착오 투성이의 와인 역정이 시작된 것이다.

와인 문화가 문헌에 의한 근거로만 봐도 기원전 5000∼4000년 고대 바빌론의 서사시에 이미 기술돼 있고 고대 로마의 융성과 기독교의 발전에 따라 넓게 전파되면서 서구문화 형성에 큰 역할을 담당해왔다는 사실, 그리고 서구인의 일상생활 속에 얼마나 깊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내가 이해하게 되는 데에는 그 후에도 여러 해가 더 걸렸다.

◇김명호(金明浩·67) 한국은행 고문은 57년 한국은행에 들어가 브뤼셀 주재원·외환관리부장·여신관리국장·부총재·은행감독원장 등을 거쳐 19대 총재(93∼95년)를 지냈다. 현재 한은 고문 외에 신한금융지주회사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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