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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요란했던 세계화정책 준비안된 개방이 禍불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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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세계화의 필요성을 더욱 새롭게 절감했습니다. 곧 '세계화를 위한 장기 구상'을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 구체화하도록 내각에 지시하겠습니다."

1994년 11월 17일, 아시아·태평양 3국을 순방 중이던 김영삼 대통령이 호주 시드니에서 세계화를 천명했다. 기업은 물론 정부 부처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세계화가 무엇인지, 국제화와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는 데는 없었다. 청와대는 "국제화보다 적극적인 상위 개념으로 국경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세계 속의 한국으로 부상하려는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 안에서도 국제화와 세계화 개념에 대한 혼란이 없지 않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불과 1년 전인 93년 金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회의에 참석하며 '국제화'를 국정 목표로 내걸었다. 94년 내내 국정 전반에 국제화 바람이 불어 국무총리실에는 국제화추진위원회가, 경제기획원에는 경제국제화기획단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세계화라는 화두를 던진 것이다. 당시 개방과 개혁은 큰 흐름이었다. 90년대 초 불황으로 미국은 일본 등 아시아의 시장개방을 강력 요구했고, 94년 4월 1백25개 나라가 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세계무역기구(WTO)의 공식 출범을 앞두고 있었다.

대통령의 지시로 국제화를 버리고 세계화를 선택한 정부는 개혁·개방 정책을 더욱 빨리, 강하게 밀고 나갔다. 12월 23일 세계화를 기준으로 선임했다는 새 내각이 들어섰다. 27일 국무회의는 세계화추진위원회라는 특별기구를 만들기로 했다. 정책 변화도 컸다. 94년 11월 환율의 일일변동폭을 확대한 데 이어 12월 외환거래의 자유화 및 선진화를 위한 외환제도 개혁방안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95∼97년 외국인의 국내 주식 소유한도 확대, 변동환율제 도입, 달러 송금 자유화, 외국인 직접투자 확대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짧은 기간에 과감한 자유화 조치가 이어지자 일부 달러가 해외로 빠져나갔고, 기업들은 싼 이자로 외국 돈을 빌려 썼다. 그 결과 경상수지 적자와 외채가 급증했다. 일부 기업이 빌린 돈을 시설투자에 쏟아붓자 중복·과잉투자도 나타났다. 94, 95년 8%대의 고성장이 기반이었던 세계화 정책은 96년 세계경제가 수축되자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업의 단기 채무와 과잉설비가 화를 불러들인 것이다.

"세계화 정책은 실력과 체제를 갖추지 않은 채 개방만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97년 외환위기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98년 2월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

지난해 11월 출범한 뉴라운드로 다시 거센 개방의 파고가 닥칠 판이다. 쌀 등 농산물은 물론 교육·법률 등 서비스 시장도 더 열어야 한다. 지나친 시장 폐쇄 못지않게 준비없는 성급한 개방도 문제다. 지금 준비를 잘 해야 한다.

이재광 경제연구소 기자 im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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