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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청년'의 주요작가 미발굴작 20여편:잊혀진 작품들 '고고학적 발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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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여태까지 '신청년'이란 잡지가 담고 있던 내용이 우리 학계에서 공식 보고되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문학사의 미스터리입니다."

잡지 '신청년' 1∼6호(5호 제외)를 분석한 한기형(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국문학)교수는 우선 이런 소회를 먼저 털어놓았다. 그는 "당시 '신청년'의 편집에 관여했던 유광렬·박영희 등 몇몇 인사의 회고록에 간간이 잡지의 이름만 등장할 뿐"이라며 "하영휘 아단문고 학예연구실장과 오영식 서울 보성고등학교 국어 교사에 의해 발견된 6호를 넘어 그 이상 발간됐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1919년 1월 20일 첫 호를 낸 '신청년'은 1919년 12월 8일 2호를 냈다. 제 3호는 1920년 8월 1일, 4호는 1921년 1월 1일에 발행했다. 이번에 목차만 확인된 5호의 발행일은 아직 알 수 없고, 6호는 1921년 7월 15일 나왔다.

형식적으로 '신청년'은 당시 청년단체였던 '경성청년구락부'와 관련돼 발간됐다. 하지만 한교수는 "특정 집단의 사상과 활동을 대변하는 기관지라기보다 경성청년구락부 회원들이 주축이 돼 만든 동인지에 가까운 잡지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창간을 주도했고 재정도 담당했던 소파 방정환이 천도교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의 사위라는 점에서 천도교와의 관련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방정환은 1917년 경성청년구락부의 결성을 주도했다. 이 구락부는 비밀결사 단체로 출발했다가 3·1운동 이후 공개돼 '신청년' 3호부터는 단체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신청년' 1∼3호를 주도한 사람은 방정환·유광렬·김선배·이복원·이중각 등이다. 4∼6호는 이들 대신 박영희·나도향·최승일 등이 새롭게 편집 책임을 맡게 된다.

무엇보다 '신청년'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지금까지 최초의 문예동인지로 알려진 '창조'(1919년 2월 1일 창간)보다 앞서 발행됐다는 점이다. 또 '창조'가 김동인·주요한·이광수 등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발행한 데 비해 '신청년'은 국내파 청년들이 만들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한교수는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 스님이 잡지 창간을 격려하는 글을 창간호 머리에 실었다는 점, 그리고 창간에 참여한 이복원(李馥遠)이 축사를 통해 이 잡지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관점을 밝힌 점도 주목된다"고 말했다.

만해 한용운은 '신청년' 창간호 머리글에서 자신을 '지음(知音)의 고수(鼓手)'로 비유하고 있는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한교수는 "만해는 청년들의 노래(행위)가 겉으로는 천진난만하고 음률에 맞지 않더라도 그것이 결코 부질없는 일이 아님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청년들의 노래가 '흑암(黑暗)의 적막(寂寞)'을 깨치는 힘이며, 한강 깊은 물의 발원이고, 하늘에 가득찬 바람과 눈 속의 매화며 또 끝내는 자연의 천기(天機)와 대우주의 율칙(律則)으로부터 보답을 받으리라고 만해는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한교수는 만해의 글에 대해 "격조 있게 은유화돼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대담하게 시대의 정조를 분석하며 조선청년의 역할을 설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청년' 편집에 참여했던 유광렬(일제 강점기 '매일신보' 기자 출신)은 자신의 회고록 『기자 반세기』(서문당, 1969)에서 만해의 글을 기억하며 "비록 일본의 폭압이 심할지라도 이 나라 애국청년들은 자라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신청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한기형 교수는 "지금까지 근대문학의 출발로 '창조'의 존재만을 절대화해 왔다면 이제 '신청년'의 발견으로 '창조'를 상대화시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순수 문예지를 표방하며 발행한 '창조'와 달리 '신청년'은 그보다 앞서 국내 토종 청년들에 의해 당시 조선 내부의 시각을 반영해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더욱이 '신청년'에 참여한 작가들이 낭만주의를 표방한 잡지'백조'와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주창한 '염군사'의 주요 동인으로 활동하게 된다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한다. 한교수는 "나도향·박영희 등이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면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인 최승일과 심훈 등이 프로문학의 시초인 '염군사'에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문제의식과 낭만적 문예지상주의가 '신청년'의 두 핵심 줄기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낭만성'과 '진보성'이라는 두 흐름이 알고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한 뿌리의 두 줄기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한교수의 지적은 한국 문학의 역사를 다시 쓸 필요성을 제기하는 해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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