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盜聽, 검찰이 수사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나라당이 28일 국가정보원의 불법 도청 증거물이라며 각계 인사들의 통화 내용이 담긴 자료를 제시했다. 지난달 22일 정형근 의원이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과 이귀남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의 통화가 도청당했다고 주장한 지 한달여 만에 이번에는 구체적인 예를 적시해 다시 폭로한 것이다.

한나라당의 발표 내용을 보면 각계 인사가 광범위하게 망라돼 있다. 여야 정치인을 비롯해 언론사 간부와 출입기자, 지방자치단체장, 민간사회단체 대표들까지 들어있다. 지난달까지의 금감위원장이나 청와대 고위 간부, 대기업 회장의 통화 도청 폭로를 포함하면 공직사회부터 민간기업까지 도청 대상이 무차별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정부는 도청이 폭로될 때마다 완강하게 부인하며 진실규명 없이 어물쩍 넘겼지만 이번만은 다르다.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인 데다 도청당한 인사들이 상당수 통화 사실을 시인하며 대화 내용도 대부분 일치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도청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 움직일 수 없는 물증 아닌가.

이런 정황인데도 도청을 부인하며 방치하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다. 특히 구체적인 도청 물증이 제시된 것은 인권 대통령을 자부하는 김대중 대통령 정부로서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동안 몇 차례 도청 폭로가 있었어도 진상을 밝히지 않은 채 흐지부지 넘긴 것이 결국 이처럼 화를 키운 결과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도청은 불법이고 범죄행위이므로 검찰이 수사해야 한다. 범죄의 일시·피해자가 명시된 구체적 물증까지 제시된 만큼 수사를 더 이상 미룰 명분도 없다. 도청 주체와 목적부터 명백히 해야 하고 한나라당이 찔끔찔끔 내놓는 도청 자료의 출처도 밝혀야 한다.

임기말 정권의 도덕성이 걸린 중차대한 사안인 만큼 검찰은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 한나라당도 도청을 대선용 정치공세로 이용하려 하지 말고 폭로 내용의 신뢰 제고 차원에서라도 진실규명을 위한 수사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