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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53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 받은 노벨상은 평화상이 아니라 문학상이었다. 노벨상위원회 측은 시상식에서 "처칠 회고록은 위대한 정치가의 직접 체험을 휴머니즘에 근거한 관용의 정신, 그리고 깊이 있고 아름다운 글로 풀어낸 역작"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직 총리의 문학상 수상은 '노벨상이 정치적으로 오염된 사례'로 흔히 언급될 정도로 이례적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직접 그의 회고록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노벨상위원회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회고록은 서문부터 감동적이다.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의 역사관은 소박하다. '과거를 자세히, 그리고 깊이 살펴보는 것이 미래의 거울이 된다'는 역사관에서, '존경하는 사람들과의 견해 차이를 기록해야 한다는 점이 매우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 고백이다. 본문은 논리적이면서도 유려하다. 특히 첫머리 히틀러의 젊은 시절 경력에 대한 짧은 설명은 발군이다. 작게는 히틀러의 뒤틀린 광기를 실감케 하고 크게는 나치즘의 운명까지 예감케 하는 통찰력을 자랑한다.

처칠의 문장력과 통찰력은 젊은 시절 군인 겸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길러졌다. 그는 1895년 쿠바에서의 전투에 처음으로 자원해 참전하면서 여비를 벌기 위해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당시 그는 전투보다 현장 르포 기사로 명성을 더 얻었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차례 종군기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전쟁을 끝내고 돌아올 때마다 보고서 형식의 책을 내놓았다. 그 결정판이 5년간 총리로 치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회고록이다.

최근 영국 BBC방송 조사 결과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처칠이 뽑힌 여러 이유 가운데 그의 회고록이 차지하는 부분이 적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리더십과 투철한 애국심, 이를 기록으로 후대에 남긴 역사의식, 그리고 영국인들이 세계 최고 언어라 자부하는 영어의 최고급 문장력까지. 처칠은 회고록을 통해 노(老)제국의 자부심을 지금까지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 점에서 노(老)정객 김종필(金鍾泌)총재의 25일 자서전 포기 발언은 씁쓸하다. 혁명의 청사진을 품고 다니던 청년장교로 5·16을 주도하고 40년간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JP, 특히 현대사를 정리할 충분한 경험·식견·문장력까지 갖춘 JP인지라 더 안타깝다.

오병상 대중문화팀장

obsang@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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