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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8) 8월 10일 승전 폭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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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오후, 전시수도 충칭에서 항일전쟁 승리를 선포하고 방송국을 나서는 장제스(가운데). 김명호 제공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사흘 후 나가사키에 두 번째 폭탄을 투하하기 10시간 전 소련도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150만 명의 소련 홍군이 만주에 진입하자 일본 관동군은 일주일 만에 8만3000여 명이 전사하고 59만4000명이 투항하는 등 괴멸했다. 관동군 사령관은 소련군 진영을 찾아가 지휘권의 상징인 군도를 제출하고 스스로 포로가 됐다. 일본은 더 이상 활로가 없었다.

8월 10일 오후 7시, 전시수도 충칭(重慶)의 중미합작소(中美合作所)에 근무하던 미군 공작원 한 사람이 황급히 군용 지프를 몰고 시내를 향했다. 영어로 “VICTORY”를 외치며 질주했다. 거리에는 혹서를 피하기 위해 나와 있던 시민들이 많았다. 불과 10여 분 만에 집안에 있던 사람들까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면식이 있건 없건 얼싸안고 깡충깡충 뛰다가 두 팔로 ‘V’자를 그리며 ‘의용군행진곡’을 불러댔다. 목청이 터져도 좋았다.

극장에선 한참 상영 중이던 영화가 중단되고 전쟁기록물이 스크린을 장식했다. 눈치 빠른 관객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댄스홀에서도 비슷한 상황들이 벌어졌다. 상인들은 창고에 쌓아두었던 폭죽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신문사들은 그제야 호외를 찍어댔다. 이날 밤 충칭은 사이렌 소리만 없을 뿐 일본군의 공습을 받을 때보다 더 시끄러웠다.

일본의 괴뢰정부(僞國民政府) 소재지 난징(南京)에선 일본이 제작한 중국어방송을 내보내던 탄바오린(譚保林)과 수허센(蘇荷先)이라는 기술자가 충칭 방송을 청취하자마자 일본이 투항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잠적해 버렸다. 10초가 될까 말까 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들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순식간에 골목마다 폭죽이 터졌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일본군들은 갑자기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11일 초저녁, 일본군 치하의 상하이 시민들은 정규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중국 국가가 나오자 도대체 무슨 일인가 했다. 대동아행진곡(大東亞行進曲)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이어서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지 모른다’는 방송을 듣고서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열띤 토론을 벌인 후에야 거리에 유황냄새가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소식을 접한 일부 지역에선 물가가 하락했다. 시안(西安)은 황금이 평소의 절반가격에 거래됐고, 전쟁기간 중 폭등했던 담뱃값도 하락했다. 안후이(安徽)성은 특히 심했다. 현찰 10만원이면 평소 46만원 하던 황금 한 냥을 구입할 수 있었다. 목재와 도자기, 찻값도 폭락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8월 15일 오후, 8년간 전쟁을 지휘한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는 연합군 중국전구(戰區) 최고사령관 명의로 전국의 군민(軍民)들에게 항일전쟁 승리를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날 밤 충칭은 또 한 차례 난리가 났다. 횃불 행렬이 10리를 이루었고 꽹과리와 나팔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빈 집들을 누비며 한몫 잡은 사람이 많을 정도로 시민들 거의가 거리에서 밤을 보냈다. 역사학자 푸스녠(傅斯年)은 달리는 차 위에서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엔 모자가 걸친 지팡이를 흔들며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을 추다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몇 년간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붉은 도시 옌안(延安)은 일본의 무조건 투항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성 전체가 동시에 불쑥 떴다가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국기란 국기는 모두 내걸고 ‘홍군 만세’등 온갖 구호를 열창했다. 린뱌오(林彪)가 지휘한 핑싱관(平型關)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다는 과일상인은 수박과 복숭아를 ‘승리의 과일’이라며 군중들에게 나눠 주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됐지만 그래도 싱글벙글했다.

옌안에 나와 있던 미군들도 합세해 광환(狂歡)의 시간을 함께했다. 늦은 밤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와 펑더화이(彭德懷)는 이들을 초청해 승리를 경축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5년 후 한반도에서 서로 총질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밤을 보냈다.
중국군은 일본군과 20여만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3500여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약 2억 명의 중국인이 유랑민으로 전락했고 전비를 포함한 재산 손실도 미화 5600억 달러에 달했다.
농담하기 좋아하는 중국인들 중에는 “일본 사람들만 전쟁하느라고 고생했다. 우리는 8년간 도망만 다녔다”고 말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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