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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길의 '반쪽 세상' 찾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강지연. 본명은 강정자. 동방생명 창업주 강의수의 무남독녀. 이화여중·고와 이화여대를 나왔다. 그야말로 금지옥엽처럼 자랐다. 그런 그녀가 만난 남자는 빨치산의 외아들. 총살당한 아버지의 아픔을 갖고 사는 남자. 신발 살 돈이 없어 '똥구두'란 별명을 듣던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극과 극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강지연은 머릿속에서 과거를 지웠다. 남편 앞에서 단 한번도 잘 살았던 시절의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어느날 강지연은 부부동반 송년 모임에 갔다.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들이 수다를 떨었다. 낡은 옷차림의 부인을 남편은 말없이 지켜봤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는 지난 시절 반쪽의 세계에 살았어요. 그러나 당신을 통해 나머지 반쪽을 만났어요. 하나된 세계를 알게 해주고 그 속에서 나를 살게 해준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요."

남편의 두 눈엔 눈물이 흘렀다. 그 말 한마디. 그것은 인간 권영길의 뇌리에 평생토록 각인됐다.

민주노총 위원장을 할 때도 총파업을 주도할 때도 그 말만을 기억했다고 한다. 감옥에 있을 때도 민주노동당 대통령후보로 나설 때도 마찬가지다. 나머지 반쪽세상은 권영길 스스로도 몰랐던 그의 인생목표였다. 그것을 부인 강지연이 깨우쳐 준 것이다.

그는 정부 대변지의 기자였다. 그러나 언론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농민운동을 꿈꿨다. 그러나 노동운동을 했다. 모순의 벽도 그의 반쪽행 앞에서 무너졌다.

30여년 전 그가 기자를 할 때였다. 시골의 할아버지 권양호가 집에 왔다. 그리곤 이렇게 꾸짖었다.

"니도 북한을 북괴라 부르냐? 괴(傀)라는 말은 짐승한테 하는 말이다. 남쪽이 남한이면 북쪽도 북한이다. 그리 욕해놓고 훗날 우째 낯을 볼 수 있겠노."

반쪽을 향한 정체성은 이미 핏속에 흐르고 있었다. 과거의 권영길은 혁명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표를 달라고 한다. 혁명으로 갈 수 없는 반쪽임을 알았기 때문이란다. 꼭 가야 할 곳이기에 돌아서라도 가려는 것이다.

그에겐 노무현 후보와 연대하라는 압력이 있다. 그래야 이회창 집권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물론 그도 이회창을 반대한다. 세상의 반쪽은커녕 한반도의 반쪽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권영길은 DJ도 반대한다. 나머지 반쪽은커녕 함께했던 농민과 노동자를 배반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盧후보를 밀수 없는 이유다. 대신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백만표를 얻으면 우리의 정책실현은 10년 걸립니다. 그러나 2백만표면 8년 걸립니다. 3백만표면 6년이고요. 나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씨앗입니다."

그가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느릴진 모르지만 멈추진 않겠단다. 그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힘들 거라고 했다. 노동자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는 것이다. 당장 내년 봄부터 문제가 터질 걸로 봤다. 그러나 그도 이제 뒤를 돌아볼 때가 됐다. 등진 반쪽의 존재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만나는 반쪽과 하나되기 위한 반쪽이다. 버리거나 지워야 할 반쪽일 수 없다. 타도의 대상은 더더욱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반쪽거울은 반밖에 못비춘다. 그걸 모른다면 그의 반쪽행은 아무 의미가 없다. 몰랐다면 이제라도 알아야 한다. 또 한번 모순의 벽을 무너뜨릴 차례다.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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