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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에 저 바람 속에』 文士 이어령의 40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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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6·25가 한창이던 부산 피란시절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던 이어령은 자신을 85학번이라고 한다. 기억이 잘못됐나 싶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문학평론가 신동욱, 소설가 최일남 등과 동기이고, 서울 환도 직후 입학한 평론가 유종호가 1년 후배라고 밝히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물론 단기(檀紀)를 사용하던 1950년대 초·중반, 그러니까 까마득한 시절의 얘기다.

그들 대학생활의 황량함을 떠올려보자. 서울 동숭동,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더미를 가로질러 이들이 찾아들던 공간은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와 '돌체'였다. "그때 들었던 차이코프스키 '비창'교향곡은 맨 정신으로는 살 수 없었던 우리 세대의 성당 없는 미사곡이었다. " 이어령의 고백(『거미줄의 상상력』, 생각의 나무, 2001)에서 당시 대학가의 살풍경이 외려 리얼하다.

강의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픽션을 piction이라고 칠판에 써대는 교수도 있었다니…. 어설픈 기성 문단에 대한 반항 심리는 강의실에서부터 싹텄다는 게 이어령의 회고인데, 조연현·서정주·김동리 등 당시 거물들을 상대로 그가 차례로 벌였던 논쟁도 그 맥락이다. 단박에 스타로 떠오른 그 청년 재사(才士)의 입에서는 독설이 마구 튀어나왔다. "문학판을 갈아엎자"는 유명한 화전민 문학 선언도 그때다.

"우리는 화전민이다. 새 세대 문학인의 항거는 불의 작업이다. 저 잡초더미와 불순물을 땅의 자양으로 바꾸는 마술이, 그리고 성실한 반역이 우리의 운명적인 출발이다. " 그것은 초라한 환경, 누추한 문화를 물려받았다고 판단한 한 젊은이가 취했던 저항의 몸짓이었다. 그 이어령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새겨진 계기는 1962년도 경향신문 연재물을 묶어낸 에세이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등장이었다.

꼭 40년 전의 그 글이 '이어령 라이브러리'란 전집(문학사상사) 첫 권으로 다시 선보였다. 여전히 흡인력 있게 읽히는 그 책이 20대의 글이라는 점이 새삼 놀랍다. 당시 대중을 사로잡았을 젊은 수사(修辭), 세련된 언어도 보인다. 그건 책 제목부터 그랬다. 본래 신문사가 제시했던 제목은 '한국문화의 풍토'였다. 그게 상투적인 제목이라고 판단한 이어령은 토박이말 '바람''흙'을 동원하고 앞뒤를 바꾸는 약간의 손질로 세련된 울림의 언어를 척하니 선보였다.

이 책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권위주의에서 당파성에 이르는 한국 풍토에 대한 비판의 매서움이다. 한국문화에 대한 이 청년의 비판은 통렬하다. '오욕의 역사 4천년을 짊어진 늙은 은사(隱士)'(2백72쪽), '운명애와 순응의 그 슬픈 풍속'(1백15쪽)…. 우리는 안다. 그것은 '정체된 동양'을 왜곡된 시선으로 규정해온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빌려온 것이고, 따라서 근거 없는 자기모멸 내지 자해(自害)의 포즈에 불과하다는 점을.

사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그 젊은이가 그토록 부정하고 싶어했던 농경사회의 가난을 떨쳐내는 데 일단 성공했다. 그렇다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이제는 낡아버려 시효가 만기됐을 법도 한데, 그게 그렇지 않다. "한번 제대로 숨을 쉬고 싶었다"는 한 청년의 반항, 남루했던 한국사회의 일취월장, 그리고 젊은 문사(文士)의 이후 행보까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읽을거리로 여전히 소구력이 있다.

그렇다면 이후 2000년대까지를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이어령을 두고 "양지만을 골라 다닌다"고 하는 일부 비판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단견에 불과하다는 판단이 든다. 한국사회가 순응의 사회이기는커녕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역동적 공간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판단 때문이다. "생각해 보세요. 세계의 어떤 문필가가 몇백년을 살아야 체험할 수 있는 인류문명의 과정을 70평생에 체험하고 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새로 들어간 '이어령과의 대화'의 그 말도 그걸 말해주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 고전 반열의 책은 50, 60대에겐 추억의 글이다. 또 젊은 세대에게는 지식사회로 가는 이정표다. 이 수사(修辭)는 책의 안표지에서 슬쩍 훔쳐온 글인데, 혹시 그게 이어령의 손길에서 탄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다 아시다시피 이어령은 현재 중앙일보 고문으로 있다. 그를 주제로 글을 쓰는 일이 과연 온당한가 싶었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쓴다. 그 이유는 이어령이란 코드를 한국문화 속에서 자리매김하고 싶었고 그래야만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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