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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출옥인데 왜 탈옥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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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김상진 감독과 박정우 작가는 우리 영화계에서 하나의 상표가 됐다. A사 냉장고, B사 세탁기처럼 그들의 이름은 한국 코미디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통한다. 그들이 '주유소 습격사건'(1999년)과 '신라의 달밤'(2001년)에 이어 '광복절 특사'에서 또 손을 잡았다. 전작의 잇따른 히트에 힘입어 박작가가 감독으로 전향한다고 하니(현재 데뷔작 '간다'를 준비 중이다) 이들 콤비를 만날 기회는 앞으로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만큼 기대가 컸다. 만화 못잖은 기발한 발상, 우화 같지만 사회 각계를 대변하는 생생한 인물, 착착 물고 물리는 우스꽝스런 상황, 감초처럼 삽입되는 적당한 사회 비판 등. 그들의 개성은 이젠 한국 영화의 주요한 양분으로 자리잡았다.

김-박 콤비의 특기는 가치 전복적인 상상력이다. 주유소라는 제한된 공간을 마구 부숴대며 사회의 구석구석을 풍자하거나('주유소 습격사건'), 엇갈린 운명의 고교 동창을 통해 착함과 나쁨의 고정 관념을 허물려고 했다('신라의 달밤'). 특히 거드름을 피우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을 자근자근 비웃었다. 겉으로 드러내고 공격하진 않았지만 국가·정치·관료·종교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을 폭소로 포장하는 기량이 뛰어났다.

'광복절 특사'에도 전작의 기조가 그대로 감지된다. 아니, 한단계 더 나아갔다. 흐름이 훨씬 자연스럽고, 웃음도 한결 정교하다. 김-박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 가운데 하나인 집단 난투 장면이 크게 줄어 왁자지껄한 느낌도 덜하다.

'광복절 특사'에선 배우들도 빛난다. '공공의 적''오아시스' 등 올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설경구의 천연덕스런 표정이 여전하고, '신라의 달밤''라이터를 켜라'로 코미디 배우의 입지를 굳힌 차승원의 성장도 쉬 확인된다. '불후의 명작'에 이어 다시 스크린 나들이를 한 송윤아의 닭살 연기도 수준급이다. 강신일·유해진·강성진·이희도·장태성 등 조연의 뒷받침도 훌륭하다.

덕분에 '광복절 특사'는 최근 쏟아져나온 조폭 코미디와 크게 구별된다. 무엇보다 황당무계한 부분이 적다. 코미디 특성상 일정 부분 대사와 연기의 과장이 삽입됐으나 억지스런 폭소를 강요하지 않기에 뭔가 찜찜한 여운이 남지 않는다. 김-박 콤비의 진화로 평가할 만하다.

'광복절 특사'는 눈물 겨운 코미디다. 무대는 교도소. 그런데 탈출기가 아니라 복귀기(復歸記)라는 점에서 새롭다. 6년 동안 숟가락으로 교도소 밑바닥에 땅굴을 파며 자유를 갈구해온 절도범 무석(차승원)과 '신발을 바꿔 신은' 애인 경순(송윤아)을 되찾기 위해 모범수 생활을 박차고 탈주에 동참한 사기꾼 재필(설경구)이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한다.

그런데 바로 그날 아침 그들이 신문에서 본 건 광복절 특사 명단. 그곳에 그들의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됐으니…. 거의 환장할 일이다. 교도소에서도 난리가 났다. 다음날 광복절을 맞아 국회 법사위 소속 의원들의 방문이 예정됐던 것. 남은 선택은 하나, 그들이 철창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일이다. 교도소 측에서도 그들의 복귀를 무조건 종용한다. 탈주 사실이 드러나면 교도소장·보안과장의 목이 달아날 판이다.

이후 영화는 교도소로 돌아가려는 순진한 죄수 두 명과 그들의 탈출을 감추려는 교도소 풍경을 교대로 보여준다. 말도 안되는 황당한 설정이지만 이를 또 그럴 듯하게 풀어가는 솜씨가 탄탄하다.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애인마저 납치해 교도소로 향하는 재필. 단순하지만 위기의 순간을 온몸으로 헤쳐가는 무석. 납치된 여인을 찾아 이들을 추격하는 경순의 새 남자인 '짭새'(경찰·유해진). 그들이 경찰에 잡히지 않도록 훼방을 놓는 교도소 파견 대원 등이 배꼽 잡는 해프닝을 쉴 새 없이 토해낸다. 순정파 설경구와 행동파 차승원은 여느 영화에도 뒤지지 않는 찰떡 호흡을 보여준다.

교도소 장면도 흥미롭다. 높으신 분의 행차를 맞으려고 죄수들을 생고생시킨다. 이에 반발한 강력범 용문신(강성진)이 졸개를 규합해 국회의원·교도소장 등을 오히려 장악한다.

또 한번 허를 찌르는 것. 그런데 이 부분에서 영화는 완급을 놓치고 만다. 지도층 인사를 무릎 꿇리는 용문신을 통해 사회의 위선을 벗겨내려는 의도는 좋았으나 이 대목을 장황하게 늘여놓은 탓에 교훈극 같은 인상마저 준다. 목소리가 크면 감동이 줄어든다.

아쉬움도 있다. 김-박의 풍자는 아직 평면적이다. '사회의 강자가 더 나쁠 수 있다. 오히려 약자가 더 인간적이다'는 기조가 도덕 교과서처럼 정형화돼 있다. 각종 모순을 가로·세로로 뚫어보는 입체적 시각의 여유가 없다. 넓고 깊은 시각에서 좀더 마음을 울리는 세련된 코미디가 나올 것이다. 평생 코미디를 만들다가 나이 예순이 되면 임권택 감독처럼 칸영화제에 나가겠다고 농담처럼 말해온 김감독이 아닌가. 2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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