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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설곳 없는 국내파 석·박사들:대학도 기업도 "국내파 경쟁력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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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서울대 경제학부는 교수 30명 중 29명이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같은 학교 화학부는 29명의 교수 모두가 외국박사 출신이며, 정치학과(11명)·외교학과(8)·언론정보학과(7)·산업공학과(8)·응용생물학부(12) 등의 교수도 전원 외국박사다.

올해 초 해외 석·박사 학위 소지 연구인력을 특채한 H사는 채용 공고도 내지 않고 인맥을 통해 해외 석·박사들을 선발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채용 공고를 내면 뽑히지도 않을 '국내파 석·박사'들이 대거 지원하기 때문에 비공개 특채 방식을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 대학원 졸업자들은 대학에서도, 기업에서도 저평가되고 있다.

◇교수임용 경쟁 탈락=서울의 H대학은 교수 임용 때 국내 학위 소지자들을 서류전형 단계에서 떨어뜨린다. 그렇다고 채용 공고에서 국내 학위 소지자는 안된다고 밝히지도 않는다. 이 대학의 한 관계자는 "우리 학교 교수들은 대부분 미국에서도 1백위권 이내 대학 출신자들"이라면서 "우수한 교수를 초빙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미국의 명문대 학위 소지자를 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항공대의 전체 교수 중 93.3%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81%)·서강대(81.3%)·이화여대(80.2%) 등도 교수 중 미국 박사 비율이 80%를 넘는다.

대학교수 채용 때 해외 학위 소지자가 우대를 받음에 따라 해외 유학생 숫자는 갈수록 늘 수밖에 없다. 해외 유학생 수는 1995년 10만6천여명에서 지난해 15만명으로 증가했다.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해외에서 경력 관리차 연구활동을 하는, 이른 바 '포스트 닥터' 과정을 이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K대 기계공학과 박사과정 尹모(30)씨도 요즘 뒤늦은 유학 준비로 바쁘다. 학위논문이 심사에서 통과된 뒤 미국으로 '포스트 닥터' 과정 유학을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尹씨는 "대학에서 외국박사를 선호하는 까닭에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더라도 해외에서 '포닥'(포스트 닥터)을 하는 게 일반적인 추세"라고 말했다.

연세대 윤대희 공대학장은 "대학원생들에게 해외유학보다는 국내에 계속 남아 박사과정 진학을 권유하지만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K대 전기전자 박사과정 李모(32)씨는 "교수들이 연구실 비는 것만 염려하지 정작 학생들의 진로에 대해선 신경써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취업 시장에서도 밀리고=중견기업 P사는 최근 재무 담당 인력을 공채했다. 한 명을 선발하는 최종 면접에 국내 명문 경영대학원 졸업자 2명과 미국의 중위권 대학 MBA 수료자 한 명이 올라왔다. 그러나 P사는 미국 MBA 출신을 채용했다. 이 회사 인사 담당자는 "서류·면접 전형 점수가 동일할 경우 해외학위 소지자를 선발하는 게 회사 방침"이라며 "국내학위 소지자는 해외학위 소지자에 비해 대인관계에서만 우수할 뿐 영어·실무·프로젝트 추진 능력에서 뒤처진다"고 주장했다.

취업 시장에서 국내 학위 소지자들이 찬밥 신세가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고학력 취업난이 심화하는 가운데서도 삼성·포스코·LG·현대 등 국내 대기업들은 올 상반기에 '해외인재 유치단'을 조직해 해외 대학을 순회하며 유학생 채용에 힘을 쏟았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진미석 연구위원은 2006년에는 전체 박사의 49.5%가 취업하지 못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S그룹 인사채용 담당자는 "솔직히 기업 인사관계자들은 국내 석·박사 학위 소지자들의 경쟁력을 낮게 평가한다. 특히 97년 외환위기 이후 대학원에 진학한 석·박사 학위자들에 대해서는 취업이 어려우니까 대신 대학원에 입학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털어놓았다.

삼성경제연구소 공선표 상무는 "노동 시장에서 기업들이 단지 간판이 좋아 해외학위 소지자를 뽑는 것은 아니다. 국내 대학들이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해 교육의 질 등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학금 지원도 해외파 우대=국내 장학재단은 모두 2백여개에 달한다. 이 중 10여개의 장학재단만이 국내 석·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국내 최대 장학재단인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은 지난 10월 모두 1백명의 1기 장학생을 선발했다. 이들은 매년 최고 5만 달러의 장학금을 지급받는다. 그러나 국내 대학원생은 지원할 수 없다. 이 재단 관계자는 "해외 우수 유학생을 지원한다는 설립 취지 때문에 아직은 국내 대학원생에게 혜택을 줄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SK그룹의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운영하는 대학원생 대상 장학제도의 경우 매년 40여명의 대학원생을 장학 대상자로 선정하는데 이 중 10여명만 국내 대학원생들이다.

장학금도 국내 대학원생에겐 학비와 매달 50만원의 생활비를 보조하지만 해외 유학생에겐 매년 4만달러를 지급한다.

justice@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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