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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조폭수사 해야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최근 며칠간 많은 사람들이 15년 전의 악몽을 떠올렸을 것이다. 서울지검 강력부에서 조사받던 피의자가 사망했다고 설명하더니(10월 27일) 구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결과가 나왔고(11월 2일), 급기야 다른 공범 조사 과정에서 물고문을 한 혐의가 있다는 대검의 중간 수사결과(11월 8일)가 발표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잊지 못한다. 그는 수배자의 소재를 대라며 추궁하는 경찰의 물고문 끝에 꽃다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특히 1987년 1월 15일 이 사건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필자로선 더욱 기억이 생생하다. 몇년 뒤 『한국을 뒤흔든 특종』(도서출판 공간)이란 책자에 다음과 같은 특종기를 쓴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朴군 사건은 시대상황이 만들어낸 특종이었다. 다시 말해 앞으로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다."

권위주의 정권이 끝나면 물고문 같은 야만적인 수사 관행은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 진행상황을 지켜보면 이같은 예측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있다.

최고의 수사기관인 검찰은 두 가지 가치를 추구한다. 실체적 진실의 발견과 인권 옹호가 바로 그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에 비유한다면 양 날개라 할 수 있다. 땅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두 날개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치는 때로 충돌한다. 실체적 진실 발견에 치우치면 강압수사로 인한 인권 침해가 우려되고, 인권 옹호에 집착하다 보면 범인을 잡기가 쉽지 않다. 60년대 미 연방대법원이 확립한 '미란다 원칙'은 흉악한 범죄 혐의자라도 진술 거부권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인권 옹호에 더 무게를 뒀다.

이번 피의자 구타 사망사건은 실체적 진실 발견에만 매달린 결과다. 문제는 강압수사가 이 사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강력사건 수사 경험이 많은 전직 검찰 수사관은 "강압수사를 해선 안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조폭·마약 수사에선 어쩔 수 없다. 이런 수사관들을 처벌한다면 나는 무기징역감이다"고 말한다. 국가인권위가 지난해 11월부터 올 10월 말까지 검찰과 관련한 진정사건 2백69건을 분석한 결과 수사관의 가혹행위에 대한 것이 7.4%(20건)로 나타났다. 시민단체에도 가혹행위와 관련한 상담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런 게 사실이라면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잦다는 말이 된다. 이를 검찰 간부들이 몰랐다면 직무를 유기한 것이고, 알고서도 묵인해 왔다면 범인을 도피시킨 꼴이니 서로가 공범이나 다름 없다. 이 때문에 검찰 내에서도 홍경령 전 검사에게만 돌을 던질 수 있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가혹행위로 피의자를 숨지게 한 것은 백번 잘못한 일이다. 그러나 폭력조직의 범죄 수법은 날로 지능화하고 있다. 인기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과 구마적이 종로에서 벌인 '일전'은 고전적인 주먹세계의 모습일 뿐이다.

요즘의 폭력 조직은 때로 돈 많은 사업가로, 때론 연예 관련 회사의 사장 등으로 우리들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 따라서 조폭·마약 수사를 멈춰선 안된다. 洪전검사가 구속 수감되던 날 그의 사무실에 전달된 꽃이나 변호인 사무실에 답지하는 각계의 성원에도 이런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검찰은 담당 검사 한명을 구속하는 것으로 끝낼 게 아니라 차제에 수사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자백에 의존하는 낡은 수사 관행에서 벗어나 과학적인 첨단 수사 기법을 도입해야 한다. 밀실수사·밤샘수사를 없애고 조사 단계에서 변호인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법원 역시 피고인들의 가혹행위 주장에 더욱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sh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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