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다시 뛰는 일본 노인들:"젊은이들 쉬는 날이 우리의 근무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평균수명 여자 84.93세, 남자 78.07세(2001년)―세계 최장수국 일본이지만 그에 따르는 고민도 심각하다. 국민들이 오래 사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지만 정부·사회가 부양해야 할 노인층 비율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고령자들이 능력껏 일해 자립하게끔 북돋우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이다. "다시 뛰자"고 나선 일본 고령자들의 취업 실태와 정부·지자체의 지원 노력을 취재했다.

"주5일 근무의 빈자리는 우리가 채운다. "

토요일인 지난 2일 오후 일본 중서부 기후(岐阜)현의 나카즈가와(中津川)시에 있는 중소기업 가토(加藤)제작소를 찾았다.

주5일 근무가 일반화된 일본이라 토요일은 휴일이다.

전동공구를 이용해 소형우체통으로 쓰일 판금통에 나사를 박고 있던 요시무라 히로코(吉村裕子·여·68)씨는 "젊은이들이 쉬는 휴일은 우리가 일하는 날"이라며 파안대소했다. "퇴직 후 적적한 나날을 보내다 일을 하게 되니 살 맛이 난다"고 말했다.

연면적 2만6천㎡ 규모의 공장에는 요시무라와 같은 고령 근로자 18명(남9·여9)이 작업복 차림으로 부지런히 기계를 조작하면서 판금 제작 등 궂은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이들은 가토 제작소가 지난해 4월 도입한 '60세 이상 노인 휴일근무제도'에 따라 채용된 직원들이다.

1백20여년전 설립된 가토제작소는 자동차 등에 쓰이는 판금을 만드는 회사다.

창업자의 증손자인 가토 게이시(加藤景司)전무는 "경기가 안좋을수록 생산비를 절감하고 납기일을 꼭 지켜야 한다고 판단해 시내 인구 5만6천명 가운데 30%나 되는 60세 이상 노인 인력을 활용키로 했다"고 밝혔다.

가토제작소는 전체 근로자 83명 가운데 고령자가 28명(34%)이나 된다. 이 중 22명은 지난해와 올해 10월 두차례에 걸쳐 치열한 경쟁(7대1)을 뚫고 새로 채용됐고, 6명은 정년을 넘겨 근무하는 기존사원이다. 휴일에만 식당 일을 하는 80세 할머니도 있다.

회사측은 4천만엔을 들여 안전시설을 보강하고 휴게실을 새로 단장하는 등 근로여건을 크게 개선했다.

회사와 고령사원들은 서로 대만족이다. 노인 13명은 회사의 요청으로 휴일 아닌 주중에도 이틀 정도 더 일한다. 요시무라 할머니는 "한달에 12∼13일 정도 일해 시간당 8백엔씩 매월 8만엔(약80만원)정도 벌어 용돈으로 쓴다"고 밝혔다.

가토 전무는 "평일은 정사원, 휴일은 노인들이 일하는 덕분에 연간 3백50일 공장을 가동하기 때문에 주문량을 1백% 소화하게 됐다"며 "노인에겐 일자리, 회사에는 이익, 지역에는 경기활성화를 안겨주는 일석삼조 효과"라고 말했다.

매출액 15억엔인 이 회사의 경상이익은 2000년 2천만엔에서 지난해에는 4천3백만엔으로 늘었다.

가토제작소 뿐이 아니다. 아이치(愛知)현 지류(知立)시의 승용차 내장품 생산회사 아키다(秋田)공업도 97년부터 고령자 채용을 확대한 결과 현재 전직원 2백30여명 중 18%가 노인이다. 회사는 고령 근로자들을 위해 별도의 생산라인을 만들고 격일 근무제·단기 근무제 등 다양한 근무시스템을 현장에 적용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여년 전부터 고령자 취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왔다. 86년 '고령자 고용안정법'을 만들어 보조금 등 각종 지원을 제도화했다. 고령자 고용에 적극적인 기업들을 매년 선발해 상도 주고 있다.

고령자고용개발협회 등 각종 기관·민간단체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현재 일본 기업의 61%는 법적인 정년(60세)을 넘어 65세까지 일하도록 허용하는 '연장근무제도'를 시행 중이다.

일본의 노인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간단한 수치들이 말해준다. 75세 이상 고령자는 올해 처음 1천만명을 돌파했다.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 인구의 18.5%인 2천3백62만명.

국민 5.4명당 한사람꼴로 세계최고 비율이다.

핵가족화로 젊은 층은 계속 감소, 노인 한명을 부양해야 하는 20∼60세 근로자 수가 10년 전에는 4.8명이었으나 올해는 3.3명으로 줄었다. 20년 후에는 두명이 부양해야 할 판이다. 고령자 취업문제가 일본의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것도 당연하다.

후생노동성은 지난해 노인 취업을 촉진하기 위해 연금제도를 개혁했다. 과거에는 연금수령 연령인 60세를 넘어서도 취업하고 있으면 65세까지는 연금수령액이 20% 이상 줄었다. 그러나 개혁안은 취업한 60세 이상 노인이 61세까지 연금을 받지 않을 경우 나중에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2025년까지는 연금수령 보류 연령을 65세로 늘릴 계획이다.

후생노동성의 이토 히로시(伊藤寬) 고령자고용대책과 사무관은 "올해는 노인 3인 이상이 창업하면 지원하는 등 고령자 취업방식을 한층 다양하게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며 "연말까지 정식직원과 임시직원간 대우 차이를 줄이는 방안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자체들도 열심이다. '고령자 고용촉진의 달'인 지난달 고베(神戶)시는 '65세까지의 고용문제 심포지엄'을, 홋카이도(北海道)의 하코다테(函館)시는 '고령자가 일하는 장면 사진전'을 여는 등 전국 자치단체별로 노인고용 확대 캠페인이 펼쳐졌다.

당사자인 고령자들의 노력도 정부·지자체에 뒤지지 않는다. 미야자키(宮崎)현 오사토(大鄕)초의 고령 주민 70여명은 2년 전 '이제부터'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청소·벼베기부터 경리업무까지 외부에서 들어오는 온갖 일감들을 접수해 회원들에게 연결해주는 단체다.

교토(京都)에서는 지난 4월 고령자만을 위한 협동조합도 출범했다.

덕분에 일본 경제에서 노인들이 차지하는 비중도 점차 커지고 있다.

지난해 노동인구 가운데 60세 이상 인구 비중은 13.7%로 1990년(11.4%)보다 2.3%포인트 늘었다.

이런 추세라면 2010년에는 18.3%로 증가할 전망이다.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취업을 원하는 60세 이상 노인 1백명 가운데 취업한 인원'은 2000년의 13명에서 지난해는 20명으로 늘었다. 80명은 여전히 쉬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장기간 계속된 경기침체도 일자리를 줄이는 요인이다.

나가시마 슌조(長嶋俊三) 고령자고용개발협회 홍보기획과장은 "지방경제를 살려 일거리를 늘리고, 단순노동보다는 적성·기술 중심으로 노인 인력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노인들을 위한 적절한 급여체계를 마련하는 일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내에서는 법적 정년을 65세로 연장하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dayyoung@

joongang. co. kr

일본 노인취업 관련 인터넷 주소

▶전국실버인재센터사업협회 sjc.ne.jp

▶고연령자고용개발협회 assoc-elder.or.jp

▶도쿄도고령자사업진흥재단 tokyosilver.or.jp

▶공공직업안정소 hellowork.go.jp

▶후생노동성 mhlw.go.jp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