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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교류 다리로 떠오른 홍명희의 임꺽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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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워낙 밥이나 얻어 먹으려는 생각으로 전설 나부랑이나 모아 꾸며놓았으니 뭐 작품이라고 할게 돼야지요.…문학작품으론 저급이지요." 벽초(碧初) 홍명희는 자신이 쓴 대하소설『임꺽정』에 대해 뜻밖에 이런 퉁명스런 언급을 남긴 바 있다. 좌우익 구분없이 두루 참석했던 해방 직후 한 문학 좌담회에서 툭하니 던졌던 말인데, 그건 두말할 것 없이 겸손에서 나온 발언이다.

중간에 잠깐 쉬었던 기간을 포함해 10년을 훌쩍 넘겼던 신문 연재 (1928~40년)내내 거의 모든 사회계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 작품이 실은 『임꺽정』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를 요약하는 것이 벽초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던 춘원 이광수의 표현이다. "『임꺽정』은 조선의 사생(寫生)이요, 지나간 조선의 레코드다".

『임꺽정』에 그토록 풍부하게 녹아있는 조선조 사회와 풍속에 대한 경의(敬意)가 바로 춘원의 말인데, 알고보면 이 미덕은 벽초가 당초 품었던 목표이기도 했다. "최근 문학은 구미문학의 영향 탓에 양취(洋臭)가 많다. 그러나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로나 남에게서는 옷 한벌 빌려 입지 않은 순 조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앞서의 발언 훨씬 전에 했던 이 고백이야말로 『임꺽정』이 거뒀던 성취에 보다 가깝다.

어쨌거나 근현대 소설사의 큰 작품 『임꺽정』의 부침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48년 남북연석회의 참가를 기점으로 벽초가 북쪽을 선택한 뒤 이 작품은 그저 내쳐 묻혀왔다. 북한에서도 그런 사정은 비슷했다는데, 85년 사계절출판사에서 전9권 짜리(7년 전 10권으로 확대됨)를 펴내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지금까지 총 10만질이 팔리고 있고, 문학사적 평가 역시 이뤄지는 중이다.

이를테면 다음 고려대 이남호 교수의 평가는 쉬 공감할 만하다. "『임꺽정』은 우리 소설연구사에서 등정되지 아니한 거봉이다."(『한국대하소설연구』,집문당,1997). 사실이다. 우선 서구 근대의 문학이론으로는 쉬 설명되지 않는 이 대하소설의 플롯과 전개방식의 성격부터 그렇다. 번역투 문장에 오염되지 않은 '순 조선'의 언어 역시 지금도 신화처럼 거론되지만, 그 실체도 더 충분히 해명돼야 한다. 어쨌거나 이 소설은 옛날 얘기처럼 구수해 요즘 작품들과 정말 판이하다.

한데 이 대하소설을 둘러싼 세상 변화가 흥미롭다. 근현대 문학의 위대한 유산 『임꺽정』이야말로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코드일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96년 첫 개최 이후 올해로 일곱번째 열린 홍명희 문학제가 그런 인식의 모태인데, 지난 2일 서울YWCA회관에서 열렸던 행사는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민예총과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주최하는 이 행사를 실질적으로 끌고 가는 단체는 충북작가회의 쪽이다.

벽초 문학비와 생가(生家)가 충북 괴산 지역에 있다는 연고 때문인데, 그 맨 앞줄에 시집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씨가 작가회의 지회장 자격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가 2년 전 8·15 통일대축전에 참석해 북측의 홍석중(벽초의 손자)씨 등을 만나 홍명희 문학제를 남북이 함께 꾸려나가기로 원칙적으로 합의를 본 것은 일단 소득이다. 올해 6월 금강산에서 열린 6·15 한 돌 행사와 지난달 3일 개천절 행사 등에서도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됐다.

그러나 본래 변수가 많은 남북교류의 특성 때문인지 올해도 북측 인사의 참석없이 행사가 진행됐다는 게 유감스럽지만, 일단 씨가 뿌려진 것은 분명하다. 내년부터 괴산에서 페스티벌 형태로 열린다는 문학제에 대한 기대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자 이런 생각의 한켠으로 『임꺽정』에 비견할 만한 대하소설이 무려 10편 내외가 된다는 점이 떠오른다.

『임꺽정』과 비견되는 황석영 『장길산』이 우선 기억나고 박태원 『갑오농민전쟁』, 홍성원 『남과 북』, 김주영 『객주』, 이병주 『지리산』도 대작이다. 여기에 박경리 『토지』, 이기영『두만강』, 조정래 『태백산맥』과『한강』, 최명희 『혼불』등을 합해보자. 작가의 초인적 노력과 함께 현대사가 거둬들인 이 성취에 경의를 표명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하다. 아직 읽지않은 하나를 선택해 다가오는 겨울밤 씨름이나 해보면 어떨까 싶다.

지난주 새 독서칼럼 집필자로 예고했던 서울대 최갑수 교수는 필자의 개인 사정 때문에 당분간 게재를 보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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