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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싸우는 두 가지 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서울지검 청사 내에서 발생한 피의자 고문치사사건이 검찰을 통타(痛打)하고 있다.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동시에 바뀌고 담당 주임검사가 구속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들 장관과 총장은 퇴임사에서 검찰의 거듭남을 위한 자성과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언론도 다양한 진단과 처방을 내놓고 있다. 대부분이 제도개편에 관한 제언이다. 즉 자백 위주에서 증거 위주로 수사 지침을 바꿔야 하며 밤샘 밀실 수사를 하지 말아야 하고, 법 집행 절차 자체가 적법하게 이뤄져야 하며 법원도 강압적 상황에서 나온 자백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런 요구들이 너무나 지당하기 때문에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다른 의견도 간간이 들린다. 이들은 강력범죄를 다루는 경우 '강압수사'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암시한다. 갈수록 흉포해지고 지능화되는 범죄를 수사력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치사사건도 과거 미제(未濟)로 처리된 조폭들 사이의 살해사건을 담당 검사가 사명감을 가지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고라며 동정심을 표하기도 한다. 일부 언론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피의자 폭행사망 사건'이라고 일견 중립적인 표현을 쓴 것이나, 죽음 자체보다 그것이 몰고 온 정치적 파장을 앞세워 보도한 경우가 이런 사정을 감안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강압수사라는 말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의 언어의 타락과 오용을 보여주는 한 생생한 실례가 아닐 수 없다. 빈틈없는 물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자백을 이끌어내는 것이 능사라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불법을 색출하기 위해서는 탈법도 용인될 수 있다는 자가당착의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강압수사는 공권력의 법적·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반사회적 행위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때로는 강압수사가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의외로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은 한국 사회의 도덕적 혼란과 법적 지체(遲滯) 현상을 여실히 증명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국가권력의 불법적 행사를 관행의 이름 아래 수용한다면 우리 모두가 언제라도 그 피해자가 될 수 있거니와, 동시에 그 공범자가 될 수도 있는 개연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살인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조직폭력배의 죽음이라고 해서 '폭행사망'이라고 형용했다면 이 표현에도 문제가 있다. 이 말이 무색무취한 만큼 취조 과정의 야만성과 불법성이 탈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의자 고문치사사건이라고 해야 정확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밑바닥 현실을 모르는 이상론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민들을 괴롭히는 폭력배들이 날뛰는 흉흉한 세태, 범죄는 나는데 공권력은 뛰기에도 급급한 현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라는 실질적인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긴박한 현실과 싸우기 위해서도 제대로 된 분석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검찰의 수장 교체와 함께 심기일전의 각오가 다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공권력 행사에 있어 널리 퍼져 있는 폭력의 습속은 특정 수뇌부의 의지만으로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검찰 내부로부터의 노력과 함께 국민들의 끊임없는 감시와 채찍질이 요구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국가에 의한 폭력 행사는 그 모습이 비교적 선명하기 때문에 시민운동이나 고발 등 대항의 방식도 그만큼 분명하게 설정될 수 있다. 이번 피의자 고문치사사건은 국가권력 행사의 정상화를 앞당기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이다. 동시에 강압수사나 피의자 폭행사망사건이라는 말의 용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담론이나 관행 속에 녹아 들어가 있는 폭력의 끈끈함과 집요함에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가 있는 폭력과의 싸움은 그만큼 섬세한 대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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