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패한 경영자'에 기회 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2면

회사정리와 화의절차로 나눠진 기업회생 제도가 회사정리 절차로 일원화되고 기존 경영진이 회사정리 관리인으로 선임될 수 있게 된다. 또 정기적 수입이 있는 봉급생활자와 자영업자가 5년 안에 빚을 갚으면 면책시켜 주는 개인회생제도가 도입된다. 법무부는 5일 기존의 파산법·화의법·회사정리법을 통합한 통합도산법안 시안을 마련, 6일 공청회를 거쳐 의견을 수렴한 뒤 정부 안을 확정하기로 했다.

법무부가 마련한 시안은 화의법을 없애는 대신 기존 회사정리법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관련법을 합친 것이다. 법무부는 신속하게 절차를 진행시켜 채권자를 보호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 회생과 관련된 시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원칙적으로 기존 경영자를 관리인으로 선임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회생절차 신청을 유도하고 기존 경영진의 경영노하우를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외환위기 이후 주로 채권단이 추천하는 인사를 법정관리인으로 임명해 운영해왔는데, 이들의 경영능력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기존의 경영자가 재산유용·은닉 또는 중대한 책임이 있는 부실경영에 관여한 경우▶채무자의 부채가 자산보다 훨씬 많은 경우▶채권자협의회가 상당한 이유를 들어 경영진 교체를 요청하는 경우 등에는 제3자를 관리인으로 선임하도록 했다.

그러나 기업의 회계 투명성이 떨어져 채권자가 견제하기 쉽지 않은 현실에서 기존 경영자를 관리인으로 선임하면 위험부담이 더 커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지법 파산부 손지호 판사는 "법정관리 신청 당시 자산이 채무보다 많거나 기존 사주가 파산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볼 만한 경우는 10건 중 1건 정도에 불과하다"며 "시안대로 시행되면 관리인에 대한 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피해가 채권자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시안은 모든 채권·채무가 동결되는 재산보전처분 결정시간도 단축했다. 신청 후 2주 안에 결정토록 돼 있는 현행 기준을 일주일 내로 바꿨다. 도산 후 회사 경영주가 채권자들에게 쫓겨다니느라 회사정리 절차가 지연되는 문제점을 막기 위해서다.

도산법은 또 회생 절차가 시작된 뒤 회생계획 인가가 나기 전이라도 법원의 허가를 받아 채무자의 영업이나 사업을 양도할 수 있고, 회생계획안의 가결 시기도 종전 첫 관계자(채권자) 집회일로부터 2개월 이내에서 1개월 이내로 단축해 부실기업 처리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채권자가 회사정리 절차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커지게 된다. 채권자협의회를 의무적으로 만들어야 하며 채권자가 감사 선임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회생계획 인가 후 회사의 경영상태에 관한 실사를 청구할 수 있게 했다. 채권자들이 원하면 관리인을 제3자로 선임해 줄 것을 요청할 수도 있다.

또 회생계획을 인가할 때 채권자에 대해 청산가치를 보장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청산가치란 회사를 더 이상 끌고가지 않고 바로 처분할 때 회수할 수 있는 자산의 규모다. 현행 법에는 청산가치를 보장하는 규정이 없어 다수의 채권자가 청산가치를 밑도는 정리계획안에 동의할 경우 소액채권자들은 청산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변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개시한 도산절차는 국내 재산에만 효력을 미치고 외국에서 개시한 도산절차는 국내 재산에 대한 효력이 없다. 그러나 시안은 이같은 속지주의에서 탈피, 외국 도산절차의 관리인이나 대표자로 인정된 사람이 국내 도산절차에 참가하거나 국내 법원에 승인을 구할 수 있도록 국제 공조체제로 바뀐다.

정철근 기자

jcom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