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9) 정보 업무 강화를 위한 구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숙군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에는 다시 우리 국군을 경악하게 하는 큰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강원도 춘천에 있는 8연대의 2개 대대병력이 무기를 지닌 채 그대로 월북한 사건이었다. 이는 숙군 작업이 심도 있게 벌어지자 자신의 정체가 발각될 것을 두려워한 좌익이 궁지에 몰리면서 취한 선택이기도 했다.

1948년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을 계기로 국군은 대대적인 숙군 작업에 들어갔다. 사진은 49년 1월 전남 보성에서 귀순자가 반란군에서 체험한 일을 군민 앞에서 증언하고 있는 모습. 종군작가 이경모(1926~2001)씨의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수록됐다.

그해 5월 초였다. 8연대 예하의 대대장인 강태무 소령과 표무원 소령이 훈련을 이유로 병력을 인솔해 그대로 화천 지역을 통해 38선을 넘어갔다. 일반 병사들에게는 “훈련을 하러 간다”는 말로 속였고, 이미 좌익에 연루된 병사들이 그에 호응해 함께 북으로 넘어갔다.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이 됐다가 1979년 신군부 세력이 주도했던 12·12사태를 당해 옷을 벗었던 정승화 예비역 대장도 그 부대의 일원이었다. 그는 운이 좋게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던 병력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에 그는 대대장을 따라나서면서 “나도 훈련에 나가겠다”고 했다가, 그를 데려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강태무 소령이 “너는 부대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그들과 동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의 월북은 미리 예정돼 있었다. 강태무·표무원 두 대대장이 병력을 인솔해 북쪽 지역에 들어섰을 때 인민군들은 거창한 환영행사를 벌였다고 들었다. 북한군이 무기를 들고 국군 병력을 맞아줄 정도였으면 두 대대장이 북쪽과 사전에 충분한 교섭을 벌였고, 귀순 의사를 이미 전달했다는 뜻이다.

당시 두 대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월북할 때 이를 반대하는 부대원들과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두 대대장은 극히 일부의 병력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이끌고 북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듬해 6·25전쟁이 벌어진 뒤 강태무는 국군 대령에 해당하는 인민군 총좌 계급을 달고 유격대를 지휘하면서 경상북도 영천 일대와 포항 등지에서 활약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응준(1891~1985)

이 사건으로 이응준 총참모장이 경질됐다. 그가 육군을 총지휘하는 사람으로서 강·표 두 대대의 월북을 방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김안일 당시 방첩과장의 증언에 따르면 춘천 8연대의 강·표 두 대대의 그런 움직임은 이미 꼬리를 밟힌 상태였다. 그는 나에게 이 두 사람을 미리 체포하자고 건의했고, 나도 그에 동의했다. 문제는 이응준 총참모장이 보고서의 글자 하나하나를 트집 잡으며 끝내 사인을 늦췄다는 것이었다. 김안일 과장은 “나중에 사건이 터진 뒤에야 이응준 총참모장이 체포 영장에 서명하지 않은 사실을 두고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늦은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 펼쳐진 이 대(大)숙군 작업은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의 것이었다. 저 바다 건너의 제주에서 1948년 4월 벌어진 폭동 사건, 뒤이어 제주 좌익 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하려고 했던 여수의 14연대가 일으킨 반란은 우리 군 내부에 좌익이 얼마나 심각할 정도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것은 다행히 우리 국군의 경각심을 크게 일깨운 사건이기도 했다.

제주와 여수에서 벌어진 좌익의 반란은 다행히 숙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국군의 반응으로 이어졌고, 급기야는 좌익 척결에 내몰린 강태무와 표무원의 2개 대대가 월북하는 사건으로 번졌다. 그러나 국군은 이런 과정을 통해 전열(戰列)을 다시 정비했다. 4700여 명에 달하는 좌익 연루 혐의자의 군복을 벗겼고, 중요 혐의자는 사형 등 중징계에 처해졌다.

군 내부에 그 많은 좌익들을 그대로 방치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도 우리는 1년 뒤에 벌어지는 6·25전쟁에서 남침해 내려온 북한군과 제대로 총을 들고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전쟁 전에 김일성에게 남로당의 박헌영이 호언장담한 게 있다. 북한이 남한을 치고 내려가는 순간 남한 곳곳에서 인민봉기가 거세게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는 남로당의 조직을 믿었고, 특히 군에 침투한 남로당 요원들의 활약상을 믿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이에 솔깃했고, 급기야 무모한 동족상잔의 처절한 전쟁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어쨌든 대규모 숙군은 공산주의자 김일성과 박헌영의 음모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숙군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북한에 대해 더 많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38선의 동향이 계속 심각했으며, 강·표 사건에서 보듯이 군대 내부에 좌익 세력이 더 남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선 38선 근처에서는 국지전 양상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은 남침 준비와 함께 38선에서 무력충돌을 야기하면서 국군의 방어태세를 시험해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여수와 순천에서 벌인 좌익의 반란은 진압했지만, 그 잔당(殘黨)이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가면서 남부 지역의 치안 상황은 늘 요동치고 있기도 했다.

이런 모든 것에 대비하려면 정보국의 업무를 강화하는 일이 필요했다. 우리는 당시 인원이 크게 모자랐다. 우수한 인력을 데려다가 북한과 우리 내부의 좌익 준동을 감시하고 대비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나는 정보국 인재 보충의 일환으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졸업하는 인재들을 불러오는 방법을 생각해 봤다.

정리=유광종 기자
백선엽 장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