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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 출신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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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6면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양재동 하나로클럽 쌀매장에는 햅쌀을 고르려는 주부들로 북적댔다. 이 매장에서 파는 쌀 브랜드만도 30여가지. 가격도 20㎏ 한 부대에 4만2천원에서 5만8천원까지 다양하다. 남편과 함께 쇼핑을 나온 50대 주부는 "여러 브랜드를 사먹어 봤는데 큰 차이를 못 느꼈다"며 "처음에는 비싼 쌀을 찾다 다음에는 고향쌀, 요즘에는 가장 싼 쌀을 사먹는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 사원들이 현장에서 벌이는 홍보전도 치열하다. 경기도 양평농협에서 파견된 백모씨는 "마땅한 구매기준이 없는 터라 현장 홍보가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농림부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쌀 브랜드는 줄잡아 1천2백여종에 이른다. 연간 10조원대에 이르는 국내 쌀시장에서 브랜드 상품의 비중이 80%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 수매분을 제외하고 시중에서 유통되는 쌀은 어떤 식으로든 브랜드를 달고 있는 셈이다.

쌀 브랜드가 느는 만큼 소비자들의 혼란도 커지고 있다. 종류와 가격이 다양해졌지만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쌀을 구매해야 할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농협 양곡마케팅팀의 정현돈 팀장은 "현재의 브랜드는 대부분 산지를 표시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어 차별화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밥맛을 좌우하는 품종이나 가공방식에 관해 설명하는 브랜드도 드물다. 품질이나 실속보다는 포장만 요란해지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많다.

브랜드 쌀이 대중화한 것은 유통시장의 변화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할인점과 대형 수퍼마켓의 세력이 커지면서 농협-도매상-쌀가게로 이어지던 종래의 유통구조가 급속히 붕괴됐다. 이 영향으로 동네 쌀집에서 되로 덜어 팔던 쌀이 산지에서 10,20㎏ 단위로 포장돼 할인점 매장에서 경쟁하게 됐고, 산지농협과 미곡종합처리장(RPC)들이 저마다 브랜드를 붙이고 나온 것이다. 브랜드 수는 많아도 실질적인 브랜드화가 정착하려면 아직 멀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농협 관계자는 "브랜드가 같더라도 산지에서 다른 품종이 한꺼번에 섞이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한 브랜드라도 10월에 산 쌀은 A품종이 주종이고, 11월에 사는 쌀은 B품종이 많이 섞여 있어 밥맛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농림부 산하 농산물품질관리원 관계자는 "쌀알의 크기가 다른 품종들을 섞어 도정할 경우 알이 큰 품종은 쌀이 많이 깎이고 알이 적은 품종은 적게 깎이는 등 밥맛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농협 하나로클럽 매장에 진열된 브랜드 30여종을 확인해 본 결과 품종을 정확히 표시한 브랜드는 10개도 안됐고 '일반미'등으로 모호하게 표시한 경우가 많았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품종을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브랜드는 여러 품종을 섞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현재 쌀시장은 이천·여주·철원 등 산지 중심의 지역 브랜드들이 주도하고 있다. 올 1∼9월 하나로클럽 양재점에서 이천의 두 농협쌀이 다른 지역 쌀보다 20% 이상 비싼데도 판매 1,2위에 올라 인기를 과시했다.

전문가들은 "이천·여주·철원산 쌀값이 비싼 것은 품질이 좋은 면도 있지만 지역을 상징하는 브랜드의 가치가 그만큼 크게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기에 걸맞은 브랜드 관리가 이뤄지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다. 한 대형 유통업체 관계자는 "유명 산지의 쌀이라도 생산자별로 품질이 각양각색이라"며 "이 때문에 산지가 유명해도 신뢰가 쌓인 특정 농협의 쌀만 취급한다"고 말했다.

유명한 임금님표의 경우 이천에 있는 10개 농협이 각각 생산한 쌀에 공통으로 붙이는 브랜드다. 이천시 소속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재배환경이나 가공공장이 달라 품질에도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철원 오대쌀도 철원 지역 네개 농협별로 가격까지 각양각색이다. 산지 브랜드의 한계 때문이라지만 소비자로서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산지 브랜드에 대응해 최근에는 '씻어나온 쌀' '완전미' 등 기능성을 강조한 브랜드 쌀들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유명 산지의 쌀은 아니지만 이온수로 세척하거나 깨진 쌀을 완전히 솎아내는 등 가공·유통과정을 차별화해 일반 쌀보다 20∼30% 높은 가격을 받고 있다. 유기농 재배쌀 등을 포함한 기능성 쌀 시장은 1조원 규모로 커져 전체 쌀시장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고르나=값비싼 브랜드 쌀이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현재로선 정부(농산물품질관리원)의 품질인증이 유일한 기준이다.

올9월 말까지 품질인증을 받은 브랜드는 1백29개로 전체 브랜드의 10% 선이다. 품질인증미는 같은 지역에서 생산하는 일반 쌀에 비해 20㎏당 2천∼5천원 가량 비싼 편이다. 농산물품질관리원 황진열씨는 "품질을 인증할 때 수질 등 재배환경을 비중있게 따진다"며 "인증을 받기 위해선 계약재배를 통해 수매한 쌀을 별도로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묵은 쌀과 섞일 염려가 없다"고 말했다. 포장 겉면에 찍한 가공일자도 눈여겨 봐야 한다.

농협 정현돈 팀장은 "쌀은 도정 후 2주일 정도 지나면 맛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며 "이 때문에 최근에 가공한 쌀일수록 맛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밥맛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브랜드나 가격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쌀을 고르는 게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글 조민근·사진 김성룡 기자 jming@joongang.co.kr

"전국에서 가장 싸구려이던 철원 쌀이 불과 10년 만에 없어서 못 파는 쌀이 됐습니다."

지금은 백화점·할인점에서 여주·이천 쌀과 맞먹는 가격에 팔리는 철원 오대쌀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름없는 쌀이었다. 철원 내 가장 큰 농협인 동송농협의 정호조 조합장은 "판매 부진으로 재고가 쌓이는 바람에 일부 상인들이 포장만 경기미로 바꿔 팔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오대쌀의 '기적'은 품종 통일에서 시작됐다.

"기존의 생산방식으로는 도저히 수도권을 뚫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철원의 재배환경에 적합하고 밥맛도 좋은 오대 품종을 특화 상품으로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동송농협은 오대벼 작목반을 운영하고 계약재배를 차츰 확대해 나갔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확량이 더 많은 품종을 고집하는 농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오대쌀 볍씨를 무료로 나눠주고 수매가격도 10% 이상 더 쳐주며 설득했다. 이를 계기로 1992년 농산물 품질관리원의 품질인증 마크도 받았다.문제는 홍보였다.

"품질은 향상시켰지만 지방 농협의 힘만으로는 이를 알리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때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대형 분유업체를 꾸준히 설득해 철원 쌀을 원료로 사용하게 했는데 이것이 대박이었습니다."

매일유업 '맘마밀' 광고에 '청정지역 철원 쌀을 사용한다'는 문구가 나가면서 환경에 대한 관심을 타고 이미지가 급상승했다.이후 냉각저장 기술을 도입하는 등 품질향상에도 힘썼다. 그 결과 동송농협의 매출액은 92년 37억원에서 94년에는 83억원으로 늘어난 데 이어 지난해에는 3백30억원을 넘어섰다. 鄭조합장은 "이제 명성만으로 버티기는 힘들다"며 "쌀시장 개방에 대비해 건강쌀 개념을 강조한 제2의 오대쌀을 개발하는 등 시장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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