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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요절한 여성작가 강경애(姜敬愛·1906∼1944)의 걸작 단편소설 『지하촌(地下村)』에 묘사된 가난을 보면 같은 가난이라도 일제시대와 요즘은 비교조차 하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주인공 칠성이네 가족은 동냥이나 날품팔이로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다. 칠성이는 어릴 때 병에 걸렸으나 약을 쓰지 못해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젖먹이 아기의 아픈 머리 위에 치료약 삼아 붙여 놓은 쥐가죽에 구더기가 끓어 끝내 아기가 죽고 만다는 마지막 장면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지하촌』이 발표(1936년)된 지 꼭 40년 후인 1976년에 조세희(趙世熙)는 중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소설에서도 가난은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굴레로 작용하지만 일제시대의 적빈(赤貧)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난다.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 46번지의 1839'에 위치한 난쟁이네 가족의 집에 '주택개량 촉진법에 따라 재개발지구로 지정됐으므로 자진 철거할 것을 명한다'는 계고장이 날아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도 성장기에 본격화한 도시 재개발을 둘러싼 원주민들의 고뇌와 갈등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이다.

난쟁이네를 포함한 행복동 원주민들은 당연히 재개발의 혜택을 누릴 여력이 없었다. "영희네도 어차피 아파트로 못갈 거 아녜요? 분양아파트는 오십팔만원이고 임대아파트는 삼십만원이래요. 거기다가 어느 쪽으로 가든 매달 만오천원씩 내야 된대요. " "그래 입주권을 다들 팔고 있나요?" "영희네도 서두르세요. "…결국 원주민들의 입주권은 부동산 업자의 손으로 속속 넘어가고 만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의 '난곡(蘭谷)'은 행정구역명은 아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난초가 무성하대서 비롯된 지명이다. 그러나 행복동 주민들이 행복하지 않았듯 난곡도 품격 높고 향기로운 동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난곡이 재개발됐는데도 원주민들의 삶은 거꾸로 열악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전세에서 월세로 옮기는가 하면 빚도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한 아파트값 급등의 광풍(狂風)이 이들의 삶에도 생채기를 냈다고 한다(본지 10월 30,31일자). 아무래도 재개발 정책이나 빈곤층 대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것 같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있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jaiken@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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