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가만있거나 아니거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다는 말이 경제 정책 만큼 잘 들어맞는 곳도 없다. 최근의 금리 현안만 해도 그렇다. 금리를 올리면 투기 억제에는 도움이 되겠으나, 가구당 3천만원이 넘는다는 가계 부채에 파산 위험이 따른다. 기업에도 임금과 물가 안정의 이익은 주겠지만, 이자 부담을 늘리거나 투자 의욕을 꺾기 쉽다. 금리를 내리는 경우의 효과와 역효과 계산 역시 다르지 않다. 공짜로 보이는 점심을 얻어먹느냐 마느냐, 점심을 먹고 나서 어떻게 갚을 것이냐 등속의 문제는 일단 정책 당국이 결정할 일이다.

한국은행 조사국의 '해외경제 포커스' 2002-8호는 미국의 금리 인하 가능성에 대한 연준 관측자(Fed Watcher)들의 전망을 머리기사로 실었다. 지난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연방기금의 목표 금리를 1.75%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으며, 이런 결정은 이미 예견된 것이어서 별로 놀랄 것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놀랄 일도 있으니, 12명 위원 가운데 찬반이 10대2로 갈렸다는 배경 설명이 그러하다. 이 회의에서 전원 일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2001년 12월 이후 처음이며, 2명의 반대표가 나온 것은 1998년 5월 이래 처음이라는 따위의 '과잉 홍보'가 오히려 어색했다. 한 위원은 취임 이후 최초의 반대고, 다른 위원은 세번째 반대라는 시시콜콜한 해설도 따분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배울 점이다. 그렇게 기록을 남기면서까지 자기 소신에 충실한 자세 말이다.

한국은행은 금리 인상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근자만 해도 지난 9월 국정감사에서 박승 총재는 금리 인상 외에는 과잉 유동성을 흡수할 방법이 없다고 대답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데도 그 방법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10월 금융통화위원회는 콜금리 목표치를 현행 4.25% 수준에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회의 뒤의 기자 간담회에서 朴총재는 부동산·유가·임금·환율 등 여러 지표로 보아 금리 인상이 절실하지만, 2시간30분이나 계속된 논란 끝에 그렇게 결정됐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전후 맥락을 추측하건대 총재 자신은 강력히 인상을 주장했으나, 다른 위원들이 유지 쪽을 고수한 모양이다. 언젠가 그는 총재 외의 금통위원 6명 가운데 총재 추천은 1명뿐이고, 나머지는 사실상 정부 몫이라고 불편한 심사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96년 12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세계 증시를 뒤흔든 강연을 했다. 4천3백60단어 분량의 긴 연설에서 지루하지 않은 부분이 별로 없었다. 이상·과열·거품 같은 단어들이 드물게 귀에 들어왔으며, "금융 자산의 거품 붕괴가 생산·고용·물가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중앙은행은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정도가 가장 독한(?) 내용이었다. 1천3백여 청중과 기자들 대부분은 평범한 연설로 받아들였고, 대통령경제자문회의 의장을 지낸 허버트 스타인만이 "증시가 폐장한 것이 다행이야"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폐장하지 않은 지구 반대편의 유럽과 아시아 시장의 주가가 기록적으로 폭락했고, 이튿날 그 태풍은 미국 증시를 강타했다. 주가 거품이 꺼지면 실물 경제에 영향을 미치므로 중앙은행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이 미적지근한(!) 말을 금리 인상의 속셈으로 알아듣고 세계의 투자가들이 주식을 팔아치운 것이다. 중앙은행 총재의 말은 이렇게 무거워야 한다.

朴총재는 국정감사 답변에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를 걱정했다.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은 세계 경제의 불안과 경기에의 찬물 세례를 우려하는 재정경제부의 반대 때문이다. 물론 대선 변수도 있다. 전윤철 경제 부총리는 한은의 성장률 추계와 유동성 과잉 주장을 믿기 어렵다고까지 중앙은행의 권위와 자존심을 건드렸다.

朴총재는 금리 인상 좌절의 억울한 사연을 여기저기서 하소연했지만, 국민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표정이다. 올려야 하면 소신대로 올리고, 올리지 못하겠으면 가만있어야 옳기 때문이다. 꼭 올리고 싶은데 못 올리게 해서 답답하다는 투의 청승에는 짜증이 난다. 박승자박(朴昇自縛)을 아느냐는 국회의원의 야유는 '금시초문' 응수로 피했으나, 금시초문이 아닐 그의 선택지는 다음 셋이리라. 올리거나, 물러나거나, 가만있거나. 다만 올리기는 글렀으나 말로나마 엄포를 놓자는 요량이라면―그 정도의 고단수라면―내가 잘못짚은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