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포도주와 저금리 체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동안 금리인상에 관한 논란이 일더니 이제는 잠잠해졌다. 대선이 임박했으니 현실적으로 물 건너간 일이 됐을 뿐 아니라 부동산이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실물경제 또한 위축되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서 그런 듯하다. 인상반대론은 이미 대세로 자리잡았고 한걸음 더 나가 금리인하 주장까지 나올 만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분위기나 단기적인 이해득실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금리수준의 적정 여부를 따져보고 예상되는 부작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금리 여부를 판정할 때 많은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간편한 방식이 있다. 경제성장률에 인플레율을 더한 값과 국고채(3년 만기) 수익률을 비교하는 것이다. 최근 성장률 6%에 물가상승률 3%를 합치면 9%가 되는 데 비해 국고채 수익률은 5.3% 정도이니 현재 상당한 저금리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저금리라는 것은 예금자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은행 정기예금금리가 연 5% 정도인데 여기에서 세금을 떼고 나면 4%가 된다. 한은 자료를 보면 실제이율은 이보다 더 낮아서 1억원을 예금하면 한달 이자수입이 30만원도 채 못된다고 한다. 예금자 손에 들어오는 이자를 연 4%로 치더라도 물가상승률 3%를 빼고 나면 실질소득은 1년에 1%밖에 늘지 않는다. 국민 전체의 실질소득이 연간 6%(세금을 감안하더라도 5%)씩 늘어나고 있는 데 비하면 이자생활자들은 지나치게 불리한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통화당국이 조금이라도 금리를 올리려 하면 목소리 큰 이해집단들의 엄청난 반발을 각오해야 한다. 과거에는 행정부와 기업이 주로 금리인상에 반대해 왔지만 이제는 이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국민들까지 합세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수년간 가계대출이 엄청나게 늘다보니 집집마다 금리 올리는 데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저금리의 유혹은 크다. 금리가 낮으면 빚 많은 기업들은 이자비용이 크게 줄어서 즐겁고 새 빚을 내서라도 투자를 늘리고 싶어진다. 개인도 이자 낼 돈이 적어지니 소비를 더 할 수 있고 또 주식이나 부동산을 사 둔 사람들은 그 가격이 오르게 마련이어서 만족스럽기만 하다. 정부로서도 투자와 소비가 늘어 성장률이 높아지고 고용이 늘어나니 대환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나친 금융 완화와 저금리체계는 상당한 왜곡과 부작용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쥐꼬리 이자'밖에 못 받는다면 누구든지 예금(저축)보다 소비 쪽을 택할 것이다. 저축률은 떨어지고 국제수지는 악화된다. 지난 5년간 흑자였던 경상수지가 아마 내년께는 적자로 반전될 것이다. 낮은 금리에 풍부한 유동성은 결국 인플레를 불러올 것이고 부동산거품을 만들고 부풀려 주게 될 것이다. 돈과 금리를 조정해 제때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미봉책으로 대응하다간 결국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야 만다. 그런 의미에서 금리정책의 타이밍은 참으로 중요하다. 일본의 경험을 보더라도 거품이 생기기 시작한 초기에는 방치했다가 나중에야 수습한답시고 너무 과격한 긴축조치를 취하는 바람에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걱정해야 할 일은 저금리로 기업이익이 늘어나면서 이것이 투자보다 임금 상승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저금리·고임금체제는 오래 계속될 수 없으며 인플레 압력이 커지면서 시장금리는 오를 수밖에 없고 결국은 외환위기 이전의 고금리·고임금체제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어느 경제학자의 옛 경고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내 나름대로 풀이한다면 이런 얘기가 된다. "돈을 많이 풀어 금리를 낮추는 것은 포도주를 과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목구멍을 넘어갈 때 달콤하며 몽롱한 기분도 즐길 만하지만 다음날 숙취로 고생하게 되는 것이고 거듭되면 간을 크게 상할 수도 있다.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