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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의 눈을 믿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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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두명의 '마릴린 먼로'가 입술 사이로 이를 내보인다. 둘 다 한 세기를 풍미했던 그 글래머 여배우는 아니다. 그들은 사진 속에서 마릴린임을 자처한다. 여자는 미국 작가 신디 셔먼이고, 또 한 명은 사진 작가 필립-로카 디 코르시아가 거리에서 만난 남창(男娼)이다. 이 세상 하나뿐이던 마릴린은 갔지만 제2, 제3의 마릴린이 되살아나 요염한 자태를 뽐낸다. 사진가들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선언한다. 가장 진실하리라고 믿었던 카메라가 찍은 인간이고 풍광이지만, 진짜 같은 가짜다.

지난 25일 막을 올려 내년 2월 2일까지 서울 순화동 호암갤러리에서 열리는 '미국현대사진 1970∼2000'전은 현대 사진의 주요 흐름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이 몰고온 창조 행위에 대한 의문 제기다. 1백60여년 전 발명됐을 때부터 재현되는 현실 그 자체라고 믿어져온 사진이 '과연 우리 눈이 보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을까'란 질문을 전시작들은 던지고 있다.

미국 현대사진을 주요 소장품으로 꼽는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 MOMA)이 보내온 40명 작가의 1백13점 출품작들은 크게 '현실' '정체성' '일상' 세 부문으로 나뉘어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믿지 마세요. 의심하세요"를 외친다.

제임스 케스비어가 찍은 '침대가 있는 감옥'은 외부와 차단된 으스스한 실내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공간은 작가 자신이 만든 소형 모형(미니어처)이다.

1980년대에 세계 사진계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셰린 르빈은 한 술 더 떠 선배 작가들인 에드워드 웨스턴이나 워커 에번스의 작품을 그대로 찍어 다시 전시했다.

아예 '모작(after∼)'이라고 밝힌 그의 작품들은 "사진에서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

빅 무니즈가 내놓은 '16,200 야드의 실(몽상가), 1854년 J B C 코로의 유리 원판을 차용'은 19세기 화가 코로의 작품을 실로 떠내 관람객 눈을 원작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구성사진 또는 무대사진(staged photography)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만드는 사진'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인형들로 꾸린 현대 여성들의 성역할(로리 시몬즈), 초현실적인 연극을 보는 듯한 현실 뒤집어보이기(샌디 스코글런드), 마오쩌둥 복장을 한 관광객의 동·서양 문화지체(쳉퀑치) 등 사진은 이제 그 절정기를 지나 쇠락기로 접어든 듯하다.

20세기 후반기 현대미술의 총아로 떠올랐던 사진은 그대로 베낄 수도 없고, 새롭게 창조할 것도 없던 포스트 모던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매체였음을 이번 전시에서 일목요연하게 증언한다.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여러 가지 행사도 마련됐다. 전시의 세 가지 주제에 맞춰 11월 7·14·21일 오후 5시 전시장 2층 비디오실에서 사진 평론가인 진동선·이영준·이경률씨가 '갤러리 강좌'를 연다.

12월 14일 오후 2시 큐레이터와의 대화, 12월 18일 오후 3시 사진작가 구본창과 함께 하는 사진 여행이 개최된다.

또 전시를 감상한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12월 29일까지 사진공모전도 열린다. 관람요금 일반 4천원, 초·중·고생 2천원, 초·중·고 단체(10명 이상) 1천원. 매주 월요일 쉼. 02-771-2381.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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