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北核 대응서 보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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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상적이지 않으면 이상(異常)이고 이상이 정도가 심하면 괴상(怪常)이 된다. 최근 대한민국에선 그런 괴상한 일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기본적인 국가 기능의 작동이 의심스런 일이 잦고, 이러고도 나라라고 할 수 있나 하는 의아심이 드는 경우가 많아졌다. 변칙대출된 4천억원의 행방을 몇주일이 지나도록 못찾는 일도 괴상하지만 최근의 도청파동을 봐도 이 나라가 정말 정상적인 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국가정보원이 불법도청이나 정치사찰을 한다면 큰 문제지만 국가최고정보기관의 비밀자료가 무더기로 야당에 넘어간다면 그게 정상적인 나라일까. 금융감독위원장과 검찰간부간의 통화자료는 하루만에 야당의원한테 넘어갔다고 한다. 국정원 내에서도 3,4명의 고위간부만 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한다. 통화했다는 두 사람이 다 통화사실 자체는 시인한 것을 보면 허무맹랑한 자료라고만 할 수는 없게 됐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도청을 한 일이 없다고 펄펄 뛴다. 이 무슨 요지경인가. 또 정보기관의 비밀은 무덤까지 갖고 간다는데 전직 국정원장은 "국정원에서 누가 자료를 흘리는지 대충 알고 있다"고 했으니 이 역시 괴상하고 전직은 아는데 현직은 모른다니 더욱 괴상하다. 도대체 원내 제1당의 대통령후보가 도청을 피하기 위해 비화기(秘話機)를 달고 다니는 나라, 정부·여당 고위층까지도 휴대전화를 바꿔가며 쓰는 나라에서 "도청은 없다"고만 하고 진상규명도 않고 넘어가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북한 핵 대응을 보면 더욱 절망적으로 우리가 이러고도 정말 나라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북 유화·강경책 중 장차 어느 쪽이 더 국익에 부합할지 단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강경·유화에 앞서 북한이 합의를 깨고 핵을 가졌다면 우리는 당연히 불쾌감을 표시하고 그들의 약속 위반을 항의하고 제재를 포함한 이쪽의 대응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DJ정부는 일절 그런 반응이 없다. 미국으로부터 핵폭탄 두개의 제조가 가능한 고농축 우라늄 30㎏을 북한이 갖고 있다는 통보를 받고도 전혀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움직였다. 마침내 미국특사로부터 북측이 핵개발을 시인했다는 통보를 받고도 공개적인 항의나 불쾌감·유감 표시도 없었다. 오직 "평화적 해결"만 말할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통보가 있은 후에도 정답게 도로·철도 연결사업에 착수하고 예정대로 쌀과 비료를 북에 제공하고 있다. 남한의 현금이 핵개발 자금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의심된다는 판에 공연이니 쇼니 관광이니 하면서 현금흐름도 계속 이어졌다. 이런 것이 정상적인 나라의 정상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평양을 다녀온 통일부장관은 "미국 특사가 거두절미해 전달한 것 같다"고 미국측이 북핵을 과장한 것처럼 흘렸다. 그러나 바로 그 이틀 후 북한 성명은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고 했으니 누가 거두절미했는지 명백하게 돼 버렸다. 이런 장관이 과연 정상적인 국가의 정상적 장관인가. 그러고도 이 장관이 고위층으로부터 어떤 책망도 들었다는 말이 없으니 이런 정부가 정상적 정부인가.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대화로 해결한다는 것은 당연한 소리다. 딴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화로 풀려면 대화의 카드가 필요한 법이다. 설사 정부의 경협 지속이 옳은 정책이라도 대화의 카드로서, 또는 이쪽의 불쾌감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경협의 일시 유보나 재검토 제스처·선적(船積)연기 등은 어느나라라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대응이었을 것이다. 지난주 파이낸셜 타임스는 평양의 남북장관급 회담의 합의사항을 보도하면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개발을 폭로했음에도 한국은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가속시키기로 합의함으로써 미국을 냉대했다"고 썼다.

DJ정부는 "핵은 결코 용납못한다"고 하면서도 처음부터 경협과 핵은 별개라고 했으니 북한은 남으로부터 어떤 불이익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고 우리로선 남은 수단이라곤 그저 '입'밖에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이런 DJ정부의 자세는 결코 정상적인 국가의 정상적인 자세라고 보기 어렵다.

가만히 보면 4천억원 문제나 도청문제·북핵문제 등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야당이나 여론이 아무리 들고 일어나도 정부는 막무가내라는 점이다. 너희는 떠들어라, 나는 내 길을 간다는 막가파·배째라 식의 자세다. 국민을 납득시키거나 동의를 얻을 생각은 이젠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한민국을 더 이상 '괴상한 나라'로 만들진 말아야겠는데 남은 4개월이 더 길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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