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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속내 까발린 풍자극< 국내 초연하는 '헨리 4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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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면

"표정을 극대화하세요, 아주 진심으로, 끈적끈적하게…."

연출가 김광보(38)씨는 1막 초반 장면부터 성이 차지않는 모양이다. 지난 24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의 연습실. 30여분 동안 한차례 연습을 진행하더니 김씨가 갑자기 중단 신호를 냈다. "자,10분 쉬고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김씨는 헬 왕자와 '삐딱한' 기사 폴스타프가 시장통 이스트치프의 선술집에서 작부들에게 수작을 거는 대목이 영 마뜩찮았다. 단순하게 보면 왕자와 그 일당들의 음탕질이지만, 그 속에 왕자와 폴스타프의 묘한 신경전이 숨어 있다.

폴스타프의 대사 한마디가 이를 말해준다. "단짝 놈아, 네 놈이 왕이 되면 거룩하신 폐하라고 말해주겠지만, 네가 어디 왕이 될 수 있겠느냐? 가망없지…." 김씨는 이런 이면의 감정들까지 이 장면에 녹아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음탕질이 끈적끈적할수록 반작용으로 드러나는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를 부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30대 촉망받는 연출가 가운데 한 사람인 김씨는 이처럼 디테일에 강한 연출가다. 이론으로 무장했다기보다는 어릴적부터 현장에서 익힌 '감(感)'으로 밀어붙이는 돌쇠형인 그가 이번엔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다. 셰익스피어의 사극(史劇)인 '헨리4세'다.

서울시극단(단장 이태주)이 11월 1∼16일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국내 초연하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초연은 이후 이 작품을 하는 다른 연출가들에게는 좋든 싫든 전례가 되므로 웬만하면 꺼리게 마련이다. 특히 셰익스피어, 그것도 공연이 드문 그의 사극을 택했으니 맘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씨는 "정치성과 풍자성이 잘 어우러진 '놀이연극'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1부와 2부로 짜여진 '헨리4세'는 영국 역사에 실존했던 헨리4세와 헨리5세 시기를 무대로 펼쳐지는 정치 사극이다. 비록 제목은 '헨리4세'지만 극을 이끄는 중심축은 그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르는 헨리5세다. 극에서 줄곧 '헨리 왕자'로 나오는 그는 갖은 일탈적인 행동으로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받아 왕권 세습이 불투명했지만, 결국 권좌에 오르는 집념의 사나이다.

흔히 이 작품은 왕이 되기 위한 올바른 길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 '학습서'로 치부돼 왔다. '리처드2세' 등 여타의 셰익스피어 사극 대부분이 왕위의 정당성과 이에 대한 절대 복종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반역을 꾸짖는 대신 도덕관과 질서의식을 옹호한다.

그러나 김씨는 이번 공연에서 이런 고정관념에 집착하지 않고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한다. "비인간적인 왕자의 권력 쟁취 과정으로 단순화해 보겠다"는 게 김씨의 계산이다. 그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인물인 왕자와 폴스타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범적인 인간' 우스터와의 관계를 통해 권력 무상과 정치의 냉혹성 등을 부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극 중에서 폴스타프는 허풍쟁이·도둑·호색가·난봉꾼이자 왕자의 인생수업 친구로 묘사된다. 이런 '디오니소스적'인 기질을 바탕으로 왕자에게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게 하지만 그는 왕자에게 결국 배신을 당한다. 왕자는 오로지 왕권 쟁취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회주의자였던 것이다.

'전방위 예술가'인 이윤택 밑에서 수업한 김씨는 1994년 '지상으로부터 20미터'로 데뷔했다. 그동안 극단 청우를 이끌며 '종로 고양이''뙤약볕''인류 최초의 키스'등 문제작을 연출했으며, 정치권력을 다룬 작품으로는 '오이디푸스-그것은 인간'(2000년)이 있다. 셰익스피어극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무영(헨리 4세)·강신구(왕자)·이창직(폴스타프)·박봉서(우스터)·강지은·최슬 등이 출연한다. 평일 오후 7시 30분, 금·토 오후 3시·7시 30분, 일 오후 3시. 02-399-1648.

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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