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450>제104화두더지人生...발굴40년: 5.풍납토성 발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풍납토성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린 일은 1997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놀란 정도가 아니고 발굴에 참가했던 발굴단 모두가 경악했다. 99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97년 당시 민속박물관장으로 있다가 이듬해 '친정'인 문화재연구소로 돌아온 나는 1년 넘게 소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99년 서울시가 풍납토성의 복원 정비를 위한 기초 자료를 얻기 위해 토성벽(土城壁) 발굴을 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해 왔다. 이번에는 내가 발굴단장이 돼 조사를 하게 됐다. 당시 토성 내부에 대한 조사나 추가 사적 지정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다만 토성 내 여러 곳에서 기존 주택을 헐어내고 재개발 계획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사전 단계로 지하 매장 문화재 조사가 재개발 건별로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토성벽 발굴 지점은 97년 백제인의 생활과 관련된 유물이 발견돼 문화재연구소가 수습 조사한 신우연립 건축지에 가까운 토성의 동쪽벽으로 정했다. 의미있는 유물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건질 만한 게 있을 개연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는 유물을 해부하는 외과의사라 할 수 있겠다. 외과의사의 수술 결과에 따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처럼 고고학자가 '유적 해부 수술'에 실패하면 귀중한 역사 유산을 영원히 잃고 마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역사가 왜곡될 수도 있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발굴 현장에서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다.

조사결과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토성벽을 따라 아무리 땅을 파내려가도 계속 토성의 새로운 부분이 드러났다. 성벽은 바닥 폭이 40m 이상이고 높이 9m가 넘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모두들 경악했다. 성벽의 축조 방식은 고대 중국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했고 고대 일본으로 건너 가 성벽 축조술에 영향을 줬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가사의한 것은 길이가 3.5㎞에 이르는 거대한 성벽을 어떤 세력들이 쌓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어느 시기에 토성이 완성된 것인지, 무슨 목적으로 성을 쌓았는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한강 유역을 주름잡던 1천 수백여년 전 백제의 장군들이 자신들의 전능한 권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역사(大役事)를 감행했던 것일까. 어쨌든 토성은 현재 서울 지역을 세력권으로 아우렀던 초기 한성백제의 실체를 드러내 줄 중요한 자료였고, 백제사 연구자들에게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99년 여름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장마철인 6월에 시작해 10월에 끝난 조사는 땅과의 싸움이 아니라 차라리 장마와 태풍과의 싸움이었다. 풍납동은 한강이 범람하면 가장 먼저 침수되는 지역으로 악명이 높았고 주민들도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제방격인 토성벽을 발굴한답시고 파헤치는 발굴단이 주민들 눈에 곱게 비칠리 없었다.

조사 도중 폭우로 성벽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발굴조사를 하지 않은 것만 못하기 때문에 발굴단은 항상 양수기를 준비시켜 두고 비를 맞으며 발굴 조사를 강행했다. 악몽같은 '물과의 전쟁'을 끝내고나니 풍납토성이 한층 외경스러웠다. 높이가 9m에 이르는 거대 성벽이 그 여름의 장마와 태풍에도 꿈쩍하지 않은 것 아닌가. 백제인들의 축성술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문화재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처지에 죄책감이 항상 뇌리를 짓눌렀다. 토성 내 백제 유적을 보호할 수 있는 몇차례의 기회를 모두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64년 삼불 김원룡 선생과 함께 한 실습 발굴이 첫번째 기회였을 것이다. 풍납토성 전체를 유적으로 확대 지정했더라면 도시화 진행으로 인한 유적 파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97년은 두번째 기회였다. 유적 보존도 보존이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토성 내 사적지정 지역을 확대했더라면 2000년 경당연립 재건축 부지 사적지정으로 인한 엄청난 파장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97년만 해도 4만명이 넘게 살고 있던 토성 안쪽을 사적 지정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긴급 수습조사를 통해 학술 자료를 얻는데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