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25일자 담화 가운데 "발가벗고 무엇을 가지고 대항한단 말인가"라는 대목은 현재 북한의 정세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북한에 대해 미국이 선제공격을 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담고 있다. 또 담화에서 미국의 북·미 기본합의 위반을 조목조목 들고 나온 것은 지적의 진위(眞僞)를 떠나 미국의 단호함에 따른 조바심의 방증이다.
그러나 북한은 왜 미 정부에 의해 미운 털이 박혔으며, 왜 북·미 합의가 그들의 생각처럼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았는지부터 우선 생각해봐야 한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뿌리깊은 불신이 그 해답이다. 일본인 납치 시인이나 핵 개발 인정 등 소위 '고백(告白)외교'를 통해 '빅뱅'을 시도하는 북한의 행태가 주변의 관심을 끄는 순간적 효과가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북한체제를 인정하고 북측과 정상적인 관계를 준비하는 상대엔 그들의 신뢰성에 더욱 의구심을 갖게 할 뿐이다.
더욱이 지난 7월 경제개혁 조치 등을 통해 변화를 시도하는 북한의 의지가 진실된 것이라면 안보문제에 있어서 또한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행동을 보여야 마땅하다. 경제 회생이든 생존권 확보든 국제사회와의 약속 이행을 통한 신뢰 회복 없이는 허망하기 때문이다.
또 바깥으로부터의 신뢰 구축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직접 당사자인 한국과의 약속 이행에서 출발하는 것이 순리(順理)다. 따라서 북측 담화 가운데 남북 간에 합의한 비핵화 공동선언의 무효화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는 태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 8년 전 북·미 기본합의 체결 당시부터 지난주 핵 개발 시인까지 북측은 줄곧 우리를 무시해 왔다. 북한이 동족의 안위를 볼모로 자주(自主)만을 고집한다면 동족이란 이유만으로 그들 주장에 편들 수는 없다.
이제 북한의 '벼랑 끝 외교'의 전술적 효과는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북측이 앞세우는 자주와 생존은 국제정세의 큰 흐름과 한국의 목소리를 인정하는 전략적 계산이 따를 때 보장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