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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고 뭘 대항한단 말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25일자 담화 가운데 "발가벗고 무엇을 가지고 대항한단 말인가"라는 대목은 현재 북한의 정세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북한에 대해 미국이 선제공격을 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담고 있다. 또 담화에서 미국의 북·미 기본합의 위반을 조목조목 들고 나온 것은 지적의 진위(眞僞)를 떠나 미국의 단호함에 따른 조바심의 방증이다.

그러나 북한은 왜 미 정부에 의해 미운 털이 박혔으며, 왜 북·미 합의가 그들의 생각처럼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았는지부터 우선 생각해봐야 한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뿌리깊은 불신이 그 해답이다. 일본인 납치 시인이나 핵 개발 인정 등 소위 '고백(告白)외교'를 통해 '빅뱅'을 시도하는 북한의 행태가 주변의 관심을 끄는 순간적 효과가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북한체제를 인정하고 북측과 정상적인 관계를 준비하는 상대엔 그들의 신뢰성에 더욱 의구심을 갖게 할 뿐이다.

더욱이 지난 7월 경제개혁 조치 등을 통해 변화를 시도하는 북한의 의지가 진실된 것이라면 안보문제에 있어서 또한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행동을 보여야 마땅하다. 경제 회생이든 생존권 확보든 국제사회와의 약속 이행을 통한 신뢰 회복 없이는 허망하기 때문이다.

또 바깥으로부터의 신뢰 구축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직접 당사자인 한국과의 약속 이행에서 출발하는 것이 순리(順理)다. 따라서 북측 담화 가운데 남북 간에 합의한 비핵화 공동선언의 무효화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는 태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 8년 전 북·미 기본합의 체결 당시부터 지난주 핵 개발 시인까지 북측은 줄곧 우리를 무시해 왔다. 북한이 동족의 안위를 볼모로 자주(自主)만을 고집한다면 동족이란 이유만으로 그들 주장에 편들 수는 없다.

이제 북한의 '벼랑 끝 외교'의 전술적 효과는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북측이 앞세우는 자주와 생존은 국제정세의 큰 흐름과 한국의 목소리를 인정하는 전략적 계산이 따를 때 보장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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