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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 아닌 '진드기' 정치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세상이 온통 어디 빌붙을 곳 없나 눈치만 살피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민주당의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소속 의원들은 탈당은 하되 정몽준 의원의 지지도를 지켜본 뒤에 움직인단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이 대학을 진학할 때에도 평생 하고 싶은 학문 분야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지원율을 지켜볼밖에. 방송이 시청률을 무시할 수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공영방송까지 덩달아 그 장단에 춤을 춰야만 하는가. 연구비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기초학문에 투자하는 게 아니라 외국에서 하고 있다는 이른바 '잘 나가는' 분야에만 뒤늦게 와르르 쏟아 붓는다.

변화를 주도하는 게 아니라 그저 배당이 큰 곳에 줄서기 바쁘다. 치타나 사자처럼 먹이를 잡으러 땀 흘리며 뛰어다니기보다 하이에나나 대머리독수리처럼 시체만 기다린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 대표적인 동물은 단연 정치인이다. 뽑아준 국민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다. 이념과 목표가 다른 정당으로 옮겨가도 좋은지 유권자들에게 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인물이 아니라 당을 보고 찍은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왜 애꿎은 우리들까지 끌고 가는가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언론에서 이런 정치인을 가리켜 '철새 정치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동물행동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그 작명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다.

치열한 정도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해마다 긴 여정에 올라야 하는 철새들과 순전히 자신의 이익만을 좇아 길만 건너 다른 당으로 옮겨가는 우리 정치인들을 같은 수준에서 비교하는 일은 한 마디로 동물들의 신성한 삶에 대한 모독이다. 어쩔 수 없어 선택한 길이지만 철새들은 그 험난한 여정에 상당수가 목숨을 잃고 만다. 우리 정치인들은 위험은커녕 그저 다음날부터 기사 양반더러 새 건물 앞에 차를 대라고 지시만 하면 된다.

게다가 '철새 정치인' 하면 괜히 낭만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깊어 가는 가을 저녁 석양을 배경으로 고즈넉이 날아가는 기러기들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무언가 인생의 연륜이 있어 보이고, 그래서 그들의 행동이 허용되기라도 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들에게 그렇게 고상한 이름을 붙여줄 까닭이 없다. 그래서 전국의 언론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그들을 '진드기 정치인'이라 불렀으면 좋겠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고 부르짖는 사람으로서 진드기를 비하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어감이라도 좋지 않으면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서 감히 제안한다.

진드기란 거미강에 속하는 동물로서 상당수가 다른 동물이나 식물에 기생해 산다. 평생토록 다른 생물의 몸에 빌붙어 먹는 진드기들도 뭐 그리 칭송할 만한 존재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조는 있어 보인다. 내가 우리 정치인들을 생각하며 특별히 떠올리는 진드기들은 이른바 '이동성 진드기(phoretic mites)'라고 부르는 이들로서 평소에는 자기 잇속만 챙기며 살다가 더 좋은 지역으로 이주해야 할 때에만 다른 동물의 몸에 올라타는 부류들이다. 이동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는 동물보다 나는 동물, 즉 곤충이나 새들을 더 선호한다. 함께 이동은 할망정 이념이 같을 필요도 없다. 그저 목표만 같으면 된다. 몸집이 너무 작아 단번에 큰 동물의 몸에 올라타지 못하는 진드기들은 자기보다 조금 더 큰 진드기의 등에 업혀 큰 동물의 몸에 오르기도 한다. 택시를 타고 비행장에 가는 격이다.

요즘엔 하도 당적을 바꾸는 정치인들이 많아 그 종류도 다양하다. 혼자서 당당하게 옮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비겁하게 남의 등 위에 숨어서 건너가는 이들도 있다.

진드기들과 어쩌면 그렇게 흡사한지 신기할 따름이다. 하기야 진드기들도 다 살자고 하는 일이고 우리 정치인들에게도 나름대로 다 절박한 이유들이 있으리라. 이 땅에서 정치를 하려면 왜 꼭 여당 정치인이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떼를 지어 당을 옮긴 이들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철새들이 날아갈 때처럼 V자 편대를 만들어 서 있다. 아 참, V자는 승리(victory)의 첫 글자이던가. 진드기 정치인들을 박멸해야 이 땅의 정치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해충 박멸은 유권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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