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골격 드러낸 명쾌한 해석 돋보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1면

지난 9월 7일 베를린 필하모니홀. 베를린필하모닉의 새 음악감독 사이먼 래틀(47)이 취임 후 첫 지휘대에 서는 날이었다.

타게스슈피겔은 공연 직전의 분위기를 '뜨거운 긴장감'이라고 표현했다.

공연이 끝난 후 이튿날 주요 일간지들은 일제히 래틀의 베를린 입성을 뜨겁게 환영했다.

래틀은 1999년 6월 단원들의 투표로 차기 음악감독으로 선출된 후에도 객원 지휘와 레코딩으로 베를린필 무대에 서왔지만 이날 공연의 의미는 남달랐다. 일찌감치 공연 실황으로 CD를 녹음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들고 나온 작품은 70여분 걸리는 말러의'교향곡 제5번'이었다.

이 음반은 영국에서 출시 직후 클래식 차트 1위에 뛰어 올랐다.

그동안 래틀이 베를린필·빈필·버밍엄심포니 등과 진행해온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 시리즈에서 쌓아온 신뢰감 때문이다. 87년 그가 32세 때 베를린필에서 데뷔할 때 연주한 곡도 말러의 '교향곡 제6번'이었다.

베를린필의 단원들은 모두가 자타가 공인하는 개인기의 소유자들이다. 하지만 앙상블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다. 단원으로 구성된 실내악단이 무려 31개나 된다. 여러 개의 실내악단이 모여 이룬 교향악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래틀은 이 취임 기념 실황 음반에서 베를린필 단원들의 잠재적 능력을 최대한 살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눈부실 정도로 치밀하고 정교한 타이밍이나 섬세한 세부 묘사 못지 않게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요동치는 감정의 기복을 잘 살려낸다.

과장된 센티멘털리즘에 빠지기 쉬운 4악장 '아다지에토'는 오히려 표정이 담담하기만 하다. 말러의 교향곡을 구름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햇빛처럼 귀를 후련하게 하는 몇 개의 순간으로 쉽게 환원시키는 얄팍한 귀의 소유자들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사실 다른 말러 교향곡에서 자주 부각되는 멜랑콜릭한 선율은 이 작품에선 전체와 유기적인 결합 상태에서만 의미를 발생할 뿐이다. 1악장의 첫 주제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연상케 하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앨범에서 래틀의 명쾌하면서도 따뜻한 해석은 말초적인 연주효과보다 전 악장을 관통하는 거대 구조의 음악 미학을 침착하면서도 자신감있게 그려낸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