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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初 '사상가 김종직' 다시 보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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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조선시대 유학사(儒學史)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새 경향은 주자학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자유로움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대한 재평가에서 시작해 조선 중기의 남명 조식을 거쳐, 조선 초기의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에 대한 재조명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런 학술적 동향은 중요성에 비해 덜 알려진 인물들을 통해 조선 사회를 보다 역동적으로 살펴보게 하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점필재에서 남명으로 내려와 실학으로 이어지는 한국 사상사의 새 그림을 펼쳐 보이고 있다는 평이다.

최근 밀양문화원(원장 손기현)주최로 경상남도 밀양시청 강당에서 열린 '점필재 김종직의 도학(道學)사상과 유학사에서의 위치'학술대회는 그런 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점필재의 고향인 밀양에는 그의 생가와 묘소, 그리고 그가 제자들을 가르친 예림서원이 있다.

동양학·한국학계의 대표적 원로 이우성(민족문화추진회장)·김충렬(남명학연구원장)·최근덕(전 성균관장)교수가 이번 심포지엄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도 특기할 만하다.

기조 강연에서 이우성 교수는 "세종~성종 시대를 살다 간 점필재는 조선시대 사림(士林)정치의 사실상 영수"라면서 "그가 시·산문만을 남기고 학술적 논변을 담은 글이 없다는 이유로 폄하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점필재에 대한 연구가 주로 문학적 성취에 편중돼 있음을 지적하는 발언이다.

조선시대 선비라면 문학·역사·도학(철학)적 소양을 모두 한 몸에 구비해야 했다. 하지만 셋 중에서 주자학을 공부하는 도학·경학(經學)을 가장 중시했다. 문학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했다. 그래서 이번 학술대회는 '시인 점필재'를 '사상가 점필재'로 다시 보는 작업에 초점을 맞췄다. "주자학이 아직 정착하지 않았던 조선 초기를 산 점필재의 시대에 퇴계 이황의 조선 중기와 같은 이론과 논쟁을 기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면서 이교수는 "문학을 통해 유학의 이상인 도(道)를 담아낸 것이 점필재 시대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점필재는 연산군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그의 제자들도 50여명이나 숙청당했다.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士禍)다. 그가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뒤늦게 문제가 됐다. 중국 초나라의 회왕(懷王)의제(義帝)가 항우에게 죽은 것을 애도한 이 글이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했다는 것이다.

김충렬 교수는 "초나라 회왕을 빗대어 단종을 조상(弔喪)한 글이 맞다"고 명확하게 규정지으면서 "시문을 통해 불의를 고발하고 후세를 경계했기에 점필재가 곡학아세(曲學阿世)하지 않는 사림의 원조가 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정치학을 전공한 박병련(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는 '김종직의 정치사상'을 조명했다. 그는 주제 발표를 통해 "고려 말기 정몽주 등에서 보여준 절의(節義)의 맥락과 조선 개국의 정치적 명분이었던 민본경세(民本經世)의 맥락이란 두 흐름을 점필재가 사상적으로 통합해 냈다"고 말했다.

나아가 박교수는 "조선 중기 이후 절의와 민본이란 유학의 본령을 제쳐두고 공허한 이론적 공방을 거듭했기 때문에 점필재 사상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선비의 이상이었다면 지금까지 다소 연구가 소홀했던 정치적 절의와 실천의 측면에서 조선 사상사를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밀양=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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