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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에 쏟은 애정 추억의 열매 주렁주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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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면

"지구에는 산이 있어서 아름답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나는 지구에는 나무가 있어서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이 자연과 사람에 관한 수필집을 엮어냈다. 비록 서문에선 "자연을 몰라도 돈벌이야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정치를,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할 수 있을까?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하고 정색을 했지만 서정적인 문체로 자연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그렸다.

1999년 건강이 나빠져 과천에서 장남이 사는 충주 근처 무너미마을로 옮긴 후 모은 글이다.

"두달에 한번 정도 병원에 가기 위해 서울을 찾는 외에 찾아 오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 읽고 아동문학 평론을 쓰는 것 외에 특별히 매인 일은 없는" 유유자적한 생활이배어난다.

43년 동안 우리 글 바로 쓰기와 바른 아동문학을 위해 몸바쳐 온 문단의 어른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올곧은 생각을 꿋꿋이 밝혀왔던 점에 비춰 약간 한가한 듯한 이번 글이 이해가 간다.

이 책의 큰 줄기는 2부의 '감나무 이야기'. 숱한 나무 중 감나무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새잎부터 베고 난 그루터기까지 감나무의 미덕을 찬찬히 살피고 있어 늦가을 시골의 정취가 아련히 되살아난다.

5월 들어서야 피어나는 감나무 새잎에서 "모든 나무들이 서로 먼저 봄을 맞이하려고 앞장을 다투는 길에서 그 차례를 양보하여 주고 뒤늦게 나온 그 아름다운 마음을 유난히 눈부시게" 느끼고 감꽃을 보며 "보릿고개를 넘기는 아이들에게 허기를 달래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꽃"이었음을 기억한다.

감나무 단풍잎이 너무 고와 그대로 밟고 지나기를 꺼리기도 하고 빈집의 감나무엔 열매가 안 열리는 것을 두고 "논의 벼가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듯이 감은 사람 소리를 들어야 열리는가 보다"라고 무릎을 치기도 한다.

선생의 글이 갖는 큰 매력은 우리의 삶에 그 터전을 두었다는 점인데 이는 자연을 노래한 수필에서도 여전하다. 감이 익어 떨어질 지경이 됐어도 따먹을 아이가 없는 농촌의 현실을 한탄하기도 하고, 떨어진 감나무잎을 매일 쓸어 버리는 일이 귀찮은 아이들이 나무를 흔들고 빗자루로 때리는 것을 보며 자연을 무시하는 획일주의적 교육을 탓하기도 한다.

우리 말과 바른 글쓰기에 관해 78년부터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글을 모은 1부 '지렁이, 내 형제'나 동화작가 권정생씨에게 보낸 아동문학 관련 편지글을 모은 3부 '감자와 고양이와 사람이야기'도 읽는 맛은 조금도 덜하지 않다.

지렁이가 죽을까봐 개숫물도 식혀서 수채에 버렸다는 우리 할머니들 이야기며 연기가 나도록 불을 피우면서 감자를 구울 수 없는데도 이를 모른 유명작가의 작품을 비판한 글 등이 눈에 들어온다.

'삶과 글은 하나'라는 저자의 지론처럼 나무 같은 생각, 산 같은 삶을 만날 수 있다.

김성희 기자

jae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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