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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코스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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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코스닥 시장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지난주 코스닥 시장을 떠나 증권거래소로 옮겨가기로 결정한 엔씨소프트 관계자의 말이다.

코스닥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는가. 1996년 7월 지수 100에서 오픈한 코스닥은 외환위기 이후 재벌 대신 벤처로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정부의 야심과 인터넷·정보기술(IT)이 곧 천지개벽을 일으킬 것이라는 대중의 조급증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수직 상승했다. 2000년 3월 10일 283.84로 정점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거래량으로 증권거래소를 앞질렀으며, 황제주로 불린 새롬기술 등의 주가는 한국의 대표 주식이라 할 삼성전자를 열배 이상 웃돌 정도였다.

그러나 화려한 날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정현준·진승현 게이트 등 정치권력이 개입된 사고가 속출한 데다 코스닥 등록으로 한몫을 챙기려는 물량이 쏟아져 수급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나라 안팎에서 IT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자 2000년 하반기 이후 추락을 거듭했다. 투자자들마저 발길을 끊은 지난주 연일 사상 최저치를 경신한 코스닥 시장에는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 있었다.

돌이켜 보면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 증권거래소(NYSE)도 비슷한 위기를 겪었다. NYSE를 대표하는 다우존스지수는 1973년 1월 대망의 1,000포인트 고지를 돌파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파문과 물가·금리 상승 등이 겹치면서 이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던 74년 말엔 거의 반토막이 났다. 당시 NYSE 증권사들의 회원권 시세는 6만5천달러로 뉴욕 택시면허료의 2.5배에 불과할 정도였다.

존 스틸 고든의 역저 『월 스트리트 제국』에 따르면 NYSE는 이런 위기를 뼈를 깎는 개혁으로 타개했다. 예컨대 1백80년 이상을 지켜온 0.25% 확정수수료 시스템을 75년에 폐기했다. 1792년 3월 증권 브로커들이 맺은 일종의 수수료 담합인 '버튼우드 합의서'를 뒤집은 것이다. NYSE가 버튼우드 합의서로부터 태동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증권사들의 위기의식과 개혁의지를 가늠할 수 있다. NYSE는 이런 개혁의지에다 과감한 전산 투자를 덧붙여 80년대 이후 세계 최대의 증권거래소라는 위상을 되찾게 된다.

존폐의 기로에 선 코스닥 시장에도 뉴욕 증권거래소 못지 않은 개혁의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저 미국 주가만 바라보고 있다면 등록 기업들과 투자자들의 '탈(脫)코스닥'바람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손병수 Forbes Korea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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