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439>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 43.데뷔 35주년 기념 공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정치판 진출은 안중에 없던 1995년 초 나는 두 가지 의미있는 행사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해 1월 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가수 인생 35주년 기념 콘서트와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한국연예협회의 제 1회 연예예술상 시상식이 그것이다.

35주년 기념 콘서트는 이순(耳順·60)을 1년 앞두고 마련한 대형 무대였다. '새벽'이라는 타이틀의 새 앨범도 냈다. 통산 11번째 앨범이었다. 신곡 가운데는 '새벽'(지예 작사·지성철 작곡)과 '개울 건너 무지개'(박건호 작사·지성철 작곡) 두 곡이 특히 맘에 들었다. 인생과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아름다운 노래였다. 이밖에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하숙생' 등 기존 대표곡들을 추가해 나름대로 기념의 의미를 되새겼다.

콘서트의 초대 손님 가운데는 현미와 민해경, 개그맨 오재미 등이 기억에 남는다. 현미는 가요계의 영원한 동지로서 이런 행사의 단골을 마다하지 않았다. 늘 고맙다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지만, 왠지 지금도 속내를 털어놓기가 여간 쑥스럽지 않다. 오재미는 내 데뷔곡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를 내 풍으로 흉내내어 배꼽을 잡았다. 육중한 체구에서 나오는 '가녀린' 몸짓과 부드러운 성량이 일품이었다. 김정택 악단이 오씨의 그런 익살을 근사하게 풀어 주었다.

화끈한 창법의 노래와 춤이 곁들여지는 '내 인생은 나의 것'으로 유명한 민해경도 기억에 남는 찬조 출연자다. 민씨와의 첫 만남은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과 미국을 도는 순회 공연을 하던 시절이다. 대한항공의 새 여객노선 개설 등을 기념해 84년과 89년 두차례 공연이 열렸다. 가수로는 김상국·이미자·박상규·주현미·전영록·민해경, 그리고 개그맨 심형래·김학래 등이 이 행사에 동행했다. 파리·베를린·런던 등지를 돌며 공연했다.

당초 항공사의 기업 이미지를 높여보자는 기획이었지만 교포들의 반응은 가슴 뭉클할 정도로 대단했다. 84년 첫 베를린 방문 때는 동서분단의 현장에서 놀라운 풍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지정된 검문소를 통해 동·서독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 우리도 저럴 날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3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큰 낭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좀 젊어보이려고 짙은 선글라스를 낀 채 박상민의 '멀어져 간 사람아'를 열심히 흉내내다가 그랬다. 가사와 멜로디 모두 다 틀리게 나가, 한마디로 엉망이 된 것이다. 끝까지 해내기는 했지만 아찔했다.

그 큰 무대에서 연습 부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다시 무슨 기념 콘서트를 계획한다면 무리한 욕심은 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무튼 그런데도 실수를 애교로 봐준 만원 관객들 덕에 공연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그해 열린 한국연예협회의 연예예술상 시상식에서 나는 첫회 수상자의 영광을 안았다. 가수 등 각 분야의 연예인들 가운데 나름대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을 뽑아 주는 상이었었다. 첫회를 대통령 표창으로 끝낸 뒤 이듬해부터는 훈장을 주면서 수상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미자·패티 김·송해·남보원씨 등이 내 뒤를 이어 이 상을 차지했다.

이 상의 첫 수상자로서 사실 나는 기쁨보다는 책임감이 앞섰다. 60년대는 그야말로 상을 받는 게 습관적이었다 할 정도로 상복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이때는 상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참 세월이 지나 상을 받고 보니 그 느낌은 달랐다.

가요계를 비롯해 연예계에 별로 기여한 게 없다는 생각에 과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참 고민 끝에 '용감하게' 이 상을 받은 것은, 앞으로 잘해달라는 후배들의 요구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받은 영광만큼 후배들에게 되돌려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95년 말 거의 우발적이다 싶을 정도의 벼락치기 결정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도 이런 동기가 조금은 작용했다. '첫 가수 출신 정치인'이라는 개인적인 영광 이면에는 가요계, 나아가 연예계의 발전을 위한 시금석이 되겠다는 소박한 꿈이 없지 않았다.

정리=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