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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안보 위협해서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아까운 젊은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간 서해교전이 발발하기 직전, 대북(對北)정보부대인 5679 부대가 작성한 정보 보고서는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지적했으나 당시 국방장관인 김동신(金東信)씨가 이를 삭제토록 지시했다는 내용의 문건이 공개돼 나라는 온통 큰 충격에 휩싸여 있다. 이 내용이 진실이냐 아니냐는 국방개혁위원회의 특별 조사를 기다려 보아야 하겠지만 만의 하나라도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생명과 안전을 군에 위임하고 있는 국민 모두는 큰 실망과 함께 군에 대한 불신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속담이 있듯 이러한 내용을 폭로하면 지휘 체계가 엄중한 군 조직에서 군복을 벗는 것은 당연한데 이마저 감수하고 폭로했다는 사실에 점수를 더 주게 된다. 그 이유는 서해교전이 발발했을 때 우리 군의 전투 수칙이 지극히 방어적이었다는 것에서부터 크나큰 시행착오를 목도했었는데 그 이후 전개된 장례식의 의전 절차 등 국민을 실망시켰던 사안이 한두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의 충격적 보고 내용도 햇볕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상호주의 원칙을 벗어나 일방적으로 북한에 퍼주기만 하고 얻어낸 것은 없지 않느냐는 비판이 난무해도 햇볕정책만이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무이한 대안이라 하여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아왔다. 그런데 지난 6월 그것도 월드컵이라는 세계적인 행사가 열리는 때에, 큰 잔치 벌여놓고 어찌 못하겠지라는 전략상의 판단이 섰는지 창졸간에 무력 공격을 해와 금쪽 같은 젊은 목숨들이 희생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북한의 도발 징후가 포착됐음에도 불구하고 지휘 계통이 이를 묵살했다는 내용이 공개되자 우리의 안보를 근본적인 관점에서부터 재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우리는 이번 사건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중차대한 생존의 문제로 규정하고 진실 여부를 철저히 밝혀내 국민 모두에게 명백하게 공개해야 할 것이며 관련자들의 잘못이 있다면 시시비비를 엄중하게 가려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햇볕정책이 우리의 안보 의식을 약화시키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겠다는 것이다. 국민도 모르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받는 정도까지 양보를 하고 있었다면 이는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며 생존을 위협하는 정책 과잉이다. 그래서 햇볕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폭넓은 의견 수렴이 필수적이라는 건전하고도 상식적인 주장을 끊임없이 제기하지 않았던가? 일본인 납치사건에서도 밝혀졌듯이 북한은 남파 공작원을 양성할 목적으로 일본인들을 납치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굳이 보수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은 절대로 사라지거나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는 이번 일을 계기로 정보 획득 및 운영 체계를 더욱 강화할 일이다. 우선 서해교전 발발 직전, 북한의 도발 징후를 통신 감청으로 포착했다는 것에 대해 우리 군의 노력을 격려할 일인데 아직도 우리 군은 독자적인 정보 획득 능력이 상당히 부족한 형편이고 독자적인 정보 획득 능력은 국가안보와 직결되기 때문에 이를 강화시켜 줄 필요성을 절감한다.

금강산댐에 큰 구멍이 나 만일의 경우 천문학적인 피해를 볼 가능성도 미국의 인공위성 정보를 통해 알았고, 서해교전 당시에도 북한측이 한국이 먼저 공격을 했다고 억지를 부리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북한이 먼저 도발했다는 관련 정보를 다 갖고 있다고 공언하자 입을 꾹 다물게 하는 쐐기를 박았던 것도 정보 획득 능력 때문이었다. 일본에 의해 인양된 괴선박(북한 선박으로 추정됨)도 일본의 기카이지마(喜界島)의 통신 감청 시설에 의해 발각돼 추적·격침된 것이었다. 이번의 정보 보고 파문은 국가안보가 근본에서부터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 총체적 점검에 나서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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