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7>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 41. 새 풍속 호텔 디너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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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나에게 1980년대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다. 89년 사별한 아내(김현숙)의 병구완을 하느라 정신없이 지냈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 소꿉친구였던 아내와는 해병 연예대 시절 결혼했다.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어 가수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보낸 아내는 80년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3년 후 재발해 연세대 암센터에서 6년간 치료를 받다가 결국 89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주치의는 당시 암센터 원장이었던 김병수 박사였다. 아내는 죽기 전 자신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고,그 뜻에 따라 유해와 유골은 현재 의학연구 교재로 쓰이고 있다.

사람들은 당시 나의 '외조'를 대단한 일로 치켜세웠지만 나는 그런 치사(致謝)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남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암환자 돕기 자선 디너쇼를 열어 가수로서 최소한의 직분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가수 생활 25년을 정리하는 자리를 겸해 85년 11월 여의도 대한생명 63빌딩 컨벤션 센터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날 공연은 김동건 아나운서(KBS)가 사회를 보았고,코미디언 이주일,가수 조용필·최진희 등이 찬조 출연했다. 꽤 성황을 이뤄 수익금 1천여만원 정도를 연세대 의대 암센터에 기증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와 공연으로 이뤄진 디너쇼는 80년대 등장한 새로운 풍속도였다. 패티 김·이미자 등이 초기 이 풍속도를 그려나갔다. 디너쇼는 아마 호텔문화가 대중화하면서 호텔의 마케팅 차원에서 유행처럼 기획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사치스럽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없지 않았다. 아직도 연말 등 특별한 시즌이면 꾸준히 이런 행사가 열리는 것을 보면 이런 인식이 많이 바뀐 것 같다.

그날 디너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이다. 그는 아무 뜻도 없이 왔다가 그 자리에서 5백만원을 쾌척했다. 이씨는 60년대 초 해병 연예대 동기로 만나 오래 동안 골프 친구로 지내왔다. 생김새가 우락부락하지만 생각이 반듯해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

여담이지만,김동건씨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그가 경기고·연세대를 다닐 시절 당구 등을 함께 치며 참 재미있게 지냈다. 김씨는 당구광이어서 대학시절 우리집 근처에 있던 낙원동 국일당구장을 그야말로 평정했다. 5백 정도의 구력을 자랑했다.

정식 공연장과 달리 디너쇼는 분위기가 왠지 무거웠다. 마이크 등 기술적인 메커니즘은 훌륭했지만 감흥을 전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명분이 좋아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

이듬해 나는 12년 만에 앨범을 내면서 다시 팬들 앞에 존재를 알렸다. 다시 '뜨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상업적인 의미는 더더욱 없었다. 다만 신곡을 내놔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 지천명(知天命·50)의 나이에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는 내용의 '황혼'등 10곡을 음반에 담았다. 중년의 취향에 맞춰 느린 템포에 재즈 스타일을 가미한 노래들이었다. 이 신곡 발표를 겸해 그해 9월 신라호텔에서 다시 디너쇼를 열었다.

80년대 개인적으로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지만 이처럼 노래는 내 인생의 또 하나의 반려자였다. 노래가 없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새삼 가수라는 직업에 대한 긍지가 일었다. 예전엔 나보다는 남을 위한 노래였으나,이젠 남보다 나를 위한 노래를 부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뒤집어 보면 그것은 팬들에게도 다행스런 일이 아닐까 한다. 내면 속으로 침잠한 상태에서 부르는 노래는 그만큼 인생의 깊이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이에 기교나 부리는 노래로 팬들의 귀를 현혹시킬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야말로 그 어떤 기교의 울림보다도 더욱 힘이 세다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나는 가을을 맞고 있다.

정리=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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