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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속의 진주'가 읊는 그 묵직한 감동이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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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집으로 가는 기차에서 시인을 만났다. 전·윤·호.

등단한 지 십년이 넘도록 그 많은 문학상(賞)과의 인연은 아예 없었고 내로라하는 평론가, 한다 하는 출판사의 주목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당연히 언론도 비켜갔다. 지난해에야 간신히 두 번째 시집을, 그나마 군소출판사를 통해 상재한 무명(無名)이다.

우연찮게 손에 들어온 이 시집을 펼쳐 든 것은 마침 퇴근길의 무료함을 달랠 만한 책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버릇처럼 책 뒤편의 해설을 읽다가, 시간이나 때우자는 가벼운 마음을 버려야 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빼어난 서정성이다. 쉽고 일상적인 언어로 고향(강원도 정선)을 그리는 마음을 그려낸 1부 '도원 가는 길'은 어느 글을 읽어도 좋다. 그 중에서도 "도원읍에 돌아가 봄 강변에 앉고 싶어/ 등짝을 후려치는 바람이 불고/ 얼어죽은 겨울이 부서져 떠내려갈 때/ 검은 벼랑 마주 보고/ 청삽사리처럼 짖고 싶어…그대 떠난 자리가 아무리 깊어도/ 바닥까지 환히 들여다 보이는/ 도원읍에 돌아가 봄 강변에 앉고 싶어"('사랑을 잃은 후'중에서)는 풋풋하지만 절절한 열정이 느껴진다. 읽다 보면 "돈 먹은 심판과/ 피에 주린 관중이 없는 곳/ 초등학교 단짝이/ 첫사랑과 사는 곳"('도원읍' 중에서)이 슬며시 그리워진다.

하지만 시인의 진면목은 사회성 짙은 2, 3, 4부에서 도드라진다. 시의 의미와 시인의 구실에 대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기상나팔처럼 일상의 잠든 의식을 깨우는 것이 시요, 사회 부조리에 대한 초병(哨兵)역할이 시인의 임무라고 여기는 이들에겐 반가운 글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쉽게 무시할 수 있다고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성냥'중에서)"다같이 가난하다는 것도 행복이다"('일산에서 보내는 편지'중에서) "온순한 것은/ 불편하게 살다가/ 스스로 죽는다"('토끼가 죽었다'중에서) 같은 구절은 깨달음으로 가는 화두를 제공한다.

아니다. 제대로 문학을 공부한 것도 아닌 처지에 대입시험 공부하듯 시어(詩語) 하나 하나를 저울질하는 일은 내 몫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사를 읽다가-지하 주차장에서'를 읽다가 가슴이 뭉클해져 객차 천장을 쳐다보며 숨을 고르던 일이나 적어두자. IMF의 고통을, 좌절한 자의 분노를 단 몇 줄의 글로 이토록 극명하게 되살린 것만으로 이 시집은 할 바를 다했다.

고개를 드니 기차는 마침 내려야 할 역을 향해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시가 준 감동을 안고 서둘러 역을 빠져나오면서 그래도 시집이 선보였을 무렵 출판담당이 아니었던 것이 다행이란 얄팍한 생각이 스쳤다. 좋은 글을, 적어도 맘에 드는 글을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는 미안함은 덜었으니까.

jae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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