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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장구 치며 세계 각국 공연 보실래요? 거창에 가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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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섭씨 35도를 훌쩍 넘긴 대낮. 피서객으로 계곡 주변이 빼곡하다. 보트를 타고, 낮잠을 자는 모습이 한가롭다. 물 건너 저편, 경사면에 설치된 간이무대에서 낯선 풍경이 벌어졌다. 배가 불룩한 코쟁이 아저씨들이 흥겨운 재즈 가락을 풀어놓았다. 키보드의 경쾌한 두드림, 트럼펫의 신나는 연주에 피서객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요상한 옷차림의 러시아 무희도 등장했다. 여기저기 휘파람이 터졌다. 순식간에 1000여 명의 구경꾼이 몰렸다. 한 피서객은 “찬물에 몸을 담근 채 공연을 감상하기는 처음이다. 이런 호사(好事)가 어디 있겠어”라며 싱글벙글 했다.

올 거창국제연극제에선 10개국 46개 작품이 공연된다. 특히 물놀이를 하며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무지개 극장이 눈길을 끈다. 태양이 쏟아지는 한낮에는 재즈나 무용이 주로 무대에 오른다. [거창국제연극제 제공]

◆계곡에 모여라=희한한 풍경이라고? ‘거창국제연극제’에선 흔한 일이다. 22회째를 맞는 거창연극제는 경남 거창군 수승대 관광지 부근에서 매년 휴가철에 열린다. 올해는 지난달 30일 개막해 15일까지 진행된다.

거창연극제의 첫 번째 매력은 ‘진짜 축제’라는 점이다. 서울에서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시댄스·서울연극제 등 일년에 100개가 넘는 예술축제가 열린다. 하지만 90%이상이 여러 극장에서 작품을 올리는, ‘릴레이 공연’이다. 한데 모여 흥에 겨워야 하는 축제의 기본과 거리가 멀다.

반면 거창연극제는 한곳에서 모든 게 벌어진다. 1만여 평에 이르는 관광지를 배경으로 한 덕에 이동 거리가 짧고, 소소한 볼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관객을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다. 피서객들은 계곡에 텐트를 치고, 물놀이를 하다가 가끔씩 벌어지는 게릴라성 공연을 즐긴다. 해가 떨어지는 저녁이면 삼삼오오 모여서 야외극장을 찾아간다. 유료 공연장은 5개, 무료 공연장은 3개다. 세계축제연구소 유경숙 소장은 “전세계적으로도 계곡을 배경으로 한 예술축제는 거의 없다. 공간의 차별성이 거창의 최대 강점”이라고 말했다.

◆청춘을 바쳤다=거창연극제가 22년 계속된 건 이종일(57·사진) 집행위원장 덕분이다. 부산 출신인 그는 본래 중학교 영어 선생님. 1980년대 초 거창으로 부임해 학생들에게 셰익스피어 희곡을 가르치는 걸 좋아했다. 당시만 해도 거창은 문화 불모지. 이 위원장은 뜻이 맞는 몇몇 교사와 함께 극단을 만들었다. 허우대 멀쩡한 사람만 만나면 “배우 하기에 딱이다”라고 꼬드기는, ‘길거리 캐스팅’도 다반사였다.

89년 창고를 개조해 소극장을 만들었다. ‘10월 연극제’란 타이틀도 달았다. 거창연극제의 전신이다. 일본극단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고, 98년 “관객이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자”는 취지로 수승대 관광지에 야외극장을 마련했다. 결국 예술을 나 몰라 했던 거창 주민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젠 거창 최고의 문화행사로 자리잡았다. 매년 15만 명이 찾을 정도다. 김민기 숭실대(언론홍보학) 교수는 “양민학살이라는 불행한 과거를 지닌 거창을 야외축제의 메카로 올려놓았다”고 평했다.

◆지역과 함께하다=야외공연장은 자연친화적이다. 구연서원을 개조한 거북극장에는 고전의 향취가 스며있고, 우람한 소나무를 무대배경으로 쓴 돌담극장은 운치가 넘친다. 관광과 예술의 결합은 지역경제 활성화로 직결됐다. 생산효과·부가가치효과·고용효과 등을 종합할 때 거창연극제의 경제적 효과는 2006년 133억원, 2008년 166억원에 이른다는 보고서도 나왔다.

지난해 거창연극제는 신종플루로 열리지 못했다. 수승대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신주범씨는 “지난해 매출이 절반 가량 주는 걸 경험하고서야 거창연극제의 가치를 새삼 알게 됐다”고 말했다. 055-943-4152~3

거창=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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