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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복한 개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7호 31면

용(龍)이 나오던 개천들 대부분이 복개 공사로 덮인 지금, 용의 일족으로 한 세상 맘껏 날아보려다 ‘억울하게도’ 성희롱 파문으로 급추락하고 있는 한 인사를 본다. 아니, 아직 용이라 부르기엔 좀 일렀을까? 그래도 ‘야망의 계절’ 주인공 정도의 용모와 스펙을 갖추었다. 어려운 유년기를 딛고 서울대 법대, 하버드대학, 사법고시 합격의 정예 엘리트 코스를 거쳐 당당히 집권여당의 꿈나무로 뽑혔다. 권력과 명성의 대로에 진입한 젊고 멋진 성공남, 이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 그의 자화상이었으리라.

강용석 의원의 억울함을 나는 안다. 그보다 훨씬 더 심한 이탈을 하고도 단지 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버젓이 고위 공직에 있는 인사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격이 성공을 따라가지 못하는 부류다. “왜, 그런 사람이 고위 공직에 있을 수 있나요?”라는 바보 같은 나의 물음에, “그러니까 거기에 있지요”라는 현자의 답이 돌아온다.

외연과 내실의 엇박자가 비단 출세한 사람들만의 문제일까?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10년 이상 살고 있는 미국인 친구가 언젠가 내게 한 말이 떠오른다. “한국은 미친 거 아니야? 다들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 모두 한쪽 방향을 향해 정신 없이 뛰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고 있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 것 같아.”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한국인 전체가 ‘개천에서 난 용들’일 것이다. 폐허의 잿더미로부터 지난 60여 년간 정신 없이 달려온 산업화와 민주화의 여정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인격은 많은 손상을 입었을 테니까…. 사회 전체에 팽배한 불신과 흑백논리, 언어적·물리적 폭력성을 보면 이런 점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모 아니면 도, 이것 말고 인생에 또 다른 옵션은 없을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 ‘TED×Seoul’이라는 콘퍼런스에서 나는 그런 이들을 만났다. ‘확산할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라는 기치 아래 전 세계 지성인과 대안을 찾는 이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TED 콘퍼런스의 서울 버전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콘퍼런스가 가능할까 했던 나의 의구심은 9분 만에 동이 난 온라인 티켓을 어렵사리 구해 장장 6시간에 걸친 프로그램 도중 단 한 명도 자리를 뜨지 않은 청중의 열기에 말끔히 녹아 버렸다.

TED는 ‘실천하는 지성’들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는 이야기를 18분의 스피치 안에 전달하는 형식이다. 그날의 주제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이었다.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어린 예술가를 깨우기를 촉구한 소설가 김영하의 수려한 스피치를 필두로, 몽골인의 난방과 대기오염을 동시에 해결해 주는 ‘적정기술’을 개발해 보급하고 있는 굿네이버스 이성범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함량을 현저하게 줄이는 습지식물을 배양하는 생태학자 강호정의 연구도 흥미로웠다. 다른 한편, 시각장애아들에게 미술을 가르쳐 자존감을 되살려 주고 있는 화가 엄정순의 경험담과 제주도 올레 길을 개발한 서명숙 이사장의 간증에 가까운 스피치는 청중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인디 음악 레이블 붕가붕가 레코드 고건혁 대표의 메시지인 ‘낙관적인 비관’(‘비관적인 낙관’) 또는 ‘자기확신 없는 자기 긍정’은 우리 젊은이들의 심적 현 주소를 말해 주었다.

연사들의 스피치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당신의 가슴과 영혼이 끌리는 곳에 올인하십시오. 그 길이 때론 험난하고 외로울 수도 있지만 꿋꿋하게 밀고 나가면 보람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였다. 토요일 오후를 반납하고 대안적 삶을 찾고 있는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청중에겐 한없이 부러운 이야기였다. 우리가 원하는 게 뭔지 알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실행할 용기만 있다면, 이 자리에 이러고 앉아 있지 않을 텐데 말이다.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행복인데, 그게 뭔지 또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지 못할 때 참 난감하다. 최근 ‘행복론’ 강의가 하버드 대학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산 용들은 대학에서부터 행복을 고민하는가? 강의를 요약한 책, 탈 벤-샤하르의 『해피어(Happier)』를 올 여름휴가의 도서 목록에 넣었다. 성공신화에 매달린 부모 세대로부터도, 민주화에 목숨을 걸던 선배 세대로부터도 배우지 못한 ‘행복해지는 법’을 혹 배울 수 있을까 해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행복한 개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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