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포용 '뒷돈'이면 정권 도덕성 타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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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대그룹이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해 북한에 비밀리에 거액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큰 파문이 예상된다. 이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타격을 받는 것은 물론 정부의 도덕성에도 치명적인 흠이 생길 전망이다.

◇북한에 지원됐나?=현대상선 김충식 전 사장이 '우리가 쓰지 않은 돈이므로 정부가 갚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문제의 4천9백억원이 현대아산을 통해 북한에 넘어갔을지 모른다는 의혹이다. 이 돈이 실제 북한에 넘어갔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은 "현대아산이 케이먼 군도(群島)에 설정한 역외펀드인 AE차이나의 자금 흐름을 조사하면 대북 자금 지원 내역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엄낙용(嚴洛鎔)전 산업은행 총재가 청와대·국가정보원과 협의까지 한 것을 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특히 현대상선이 현대아산을 지원하는 바람에 자금사정이 어려워지자 국책은행인 산은이 지원했다는 점은 확인되고 있다.

산은이 4천9백억원을 현대상선에 지원한 것은 현대상선이 현대아산에 8백40억원을 증자 형식으로 대준 직후이기 때문이다. 현대상선은 2000년 3∼5월에 4천억원 이상의 자금을 채권단으로부터 회수당해 현금사정이 나빴기 때문에 현대상선이 미리 산은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기로 하고 현대아산에 거액을 출자했을 가능성도 있다.

◇지원했다면 누가 주도했을까=현대에 대한 지원이 재정경제부나 금융감독위원회를 배제한 채 청와대·산은 채널만으로 이뤄졌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재경부는 이런 논의를 한 적이 없다"며 "당시는 현대에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청할 시점이었기 때문에 금감위도 그런 일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장관도 "당시 재경부나 금감위 쪽에선 기업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우와 현대 사이에 균형이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청와대는 한 쪽으론 강력한 구조조정을 외치면서 다른 한 쪽으론 대북 지원에 필요한 현대를 도우려 해 일부 정부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의 이같은 이중 플레이를 성토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2000년 초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한 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또 하나의 의혹은 현대건설 등을 통해서도 북한에 거액이 넘어갔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4억달러보다 훨씬 많은 돈이 북한에 넘어갔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했고, 이성헌 의원은 "현대건설도 1억5천만달러를 북한으로 보냈다"고 주장했다.

◇엄낙용 전 산은 총재 왜 조기 퇴진했나?=嚴전총재가 대북 사업을 하는 현대그룹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으로 대처해 조기 퇴임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은 "嚴총재가 현대 회사채 인수와 신용보증기금 출연과 관련해 재경부 장관에게 공문을 요구해 재임 8개월 만에 강제 퇴임됐다"고 주장했다.

嚴전총재는 "모든 사안에 대해 서류를 달라고 요청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전 정부 고위 관계자는 "嚴씨가 산은 총재가 된 후 개인적으로 '더 이상 현대에 대한 지원을 못 해주겠다''법으로 허용된 선에서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며 "嚴씨가 왜 8개월 만에 물러났는지를 추론해 보면 (실상을)알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측 반응〓현대상선·아산은 '사실무근'이라는 주장이다. 현대 관계자들은 "정치의 계절만 되면 나오는 '현대 때리기' 일환"이라며 "금강산 사업에도 큰 지장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현대상선 신재희 이사는 "만약 현대아산에 그만큼 많은 돈을 줬다면 현금 처리상 마땅한 계정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다"고 밝혔다. 현대상선 김충식 전 사장은 지난 10일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출국했다. 현대아산도 "당시 현대상선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대북지원은 1999년부터 올 8월말까지 토지 및 관광사업 대가로 준 4억달러가 전부라는 것이다.

허귀식·김정하 기자

ksl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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