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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는 뭘하고 있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왜 사람들은 법을 지키는가』. 법심리(法心理)학자 톰 타일러가 1990년에 펴낸 이 책에는 매우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담겨 있다. 사람들이 법을 지키는 이유에 대해 종래 두 가지 상이한 관점이 제시돼 왔다. 그 하나는 '도구적' 관점이다. 사람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 경우에 초래될 이익과 손실을 계산해 행동을 결정하며, 법을 준수하는 것은 제재가 두려워서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규범적' 관점이다. 사람들이 법에 따르는 것은 법과 법 집행당국이 정당하다고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 큰 지지를 받아온 것은 도구적 관점이었다. 그러나 타일러의 연구 결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보여준다. 시카고 주민을 대상으로 장기적이고 방대한 설문조사를 행한 그의 연구결과는 규범적 관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사람들이 법에 따르는 것은 그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법 집행당국과 부딪쳐 본 사람들의 경우 법 집행이 정의로우냐 아니냐는 판단에 따라 달리 반응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이 법을 지키는 것은 제재가 무서워서보다 법과 법집행 당국의 정당성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런 연구 결과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상당 부분 유효하리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한국인의 법의식에 관한 여러 조사결과를 보면 한마디로 한국인은 아주 기회주의적이다. 한편에서 국가기관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내는가 하면, 다른 한편 법을 꼭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수의 응답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을 자신의 법 위반에 대한 심리적 면죄부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근 일부 종합병원의 장기파업에 경찰력을 투입해 진압한 일들이 있었다. 이제는 별 뉴스거리도 못될 만큼 언제부턴가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불법파업에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며 '법과 원칙'을 내세우는 주장에 이의를 달기 힘들다. 그런 한편으로 진압경찰에 울부짖으며 맞서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음은 어째서인가. 자신들의 행동에 불법한 점이 있음을 알면서도 이를 무릅쓰고 저처럼 나서는 데에는 나름대로 심리적 빌미가 있지 않을까.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법을 안 지키는 것이 우리만인가. 우리를 진압하는 경찰에는 불법이 없나. 다른 국가기관들, 특히 높은 자리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수십억원이 오가는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에 비하면 우리의 생존을 위한 행동에 작은 불법이 있다한들 무슨 큰 잘못이란 말인가.'

불법파업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각 분야의 집단이기주의가 법 무시를 마다하지 않는 무법상황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국가기관 꼭대기에서부터 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대통령 퇴임 후를 위해 불법 예산전용을 하더라도 사과 한마디로 넘어간대서야 법 질서가 잡힐 수 없다. '총리 서리제' 위헌문제도 마찬가지다. 과거 관행을 내세우지만 설득력이 없다. 가장 민주적임을 자부하는 현 정권이 유신 독재와 5공(共)시대의 위헌적 사례를 근거로 삼는대서야 말이 아니다(제1공화국 헌법의 관련규정은 지금과 다르다).

이제 대통령선거가 석달도 남지 않았다. 새 대통령의 최대 과제의 하나는 법의 지배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질서와 사회정의만이 아니라 더 잘 살기 위해서도 법의 지배가 확립돼야 한다. 그러려면 대통령선거부터 달라져야 한다. 종래 대선(大選)은 어땠나. 선거비용제한 등 선거운동규제조항은 제 구실을 못했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에는 더러 당선무효 판결도 내려지지만 대선은 그런 것도 아니다.

'3김(金)시대'가 막을 내리는 이번 대선 역시 아무 달라지는 모습이 없다. 오히려 더 극렬한 음해 공방으로 혐오감만 자아낼 뿐이다. 선거법의 '후보자비방죄'는 후보예비자에 대한 비방에도 적용되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면 말고'식의 불법 저질 비방이 끝을 모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무얼 하고 있는가. 언제까지 대선을 무법선거로 내버려 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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