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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개발몸살서울]도시계획도 무시하고 "일단 짓고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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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외국인의 눈에 서울은 이상한 도시다. 보기에 멀쩡한 아파트 벽에 재건축을 '경축'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리기 때문이다. 강남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는 캐나다인 엘 하워드(59)는 "집이 낡아서 헐린다고 자랑하는 곳은 서울뿐일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해못할 부분은 이뿐만 아니다. 녹지나 학교 등 생활 기반 시설을 갖추지 못해도 주상복합빌딩이나 오피스텔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주차시설이 부족한데도 초고층 상가타운이 조성된다. 초고층 아파트 단지와 저층의 다세대 연립주택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는 것도 진풍경이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기호 교수는 "십수년간 지속된 서울시와 정부의 무계획적인 개발논리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며 "엉망이 돼 버린 서울의 스카이라인은 파행적인 우리나라 재개발 정책의 한 단면"이라고 지적했다.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주상복합빌딩=건설업자 입장에서 주상복합 아파트와 오피스텔은 분양이 쉬울 뿐만 아니라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어 매력적이다. 업무용 빌딩의 경우 공사비는 물론 유지·관리비까지 부담해야 하고 경기에 따라 공실률이 달라져 수익을 예측하기 힘들다. 게다가 주상복합과 오피스텔은 환금성이 보장돼 분양에 어려움이 없고 도로나 주차장 등 기반시설 확보의 요건이 까다롭지 않아 업자들의 구미에 맞는다.

그러나 도시기반시설의 용량을 초과하는 주상복합빌딩을 마구 짓는 바람에 교통난이 심각해졌다. 최근 여의도 일대에 주상복합건물이 속속 들어서면서 원효대교에서 대방동으로 연결되는 용호로의 경우 1㎞가 채 안되지만 출·퇴근 시간대에는 40분이 넘게 걸린다. 더욱이 2005년까지 이 일대에 주상복합건물 7개동 1천3백여가구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평균 차량 속도가 절반 이하로 떨어질 전망이다. 오는 10월부터 2003년까지 3천여가구의 입주가 완료되는 강남구 도곡동 주상복합단지 주변도 교통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삶의 질과는 거리가 먼 재개발=성동구 하왕십리 A아파트 단지 앞 재래시장 골목은 아침 저녁이면 북새통을 이룬다. 단지로 진입하는 통로가 골목길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단독주택과 소형 연립주택 단지였던 이곳도 재개발되면서 고층 아파트가 지어졌으나 도로·공원·노인정 등 기반 시설이 입주한 가구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생활환경이 열악해졌다.

재개발이 사업자의 논리에 따라 진행되다 보니 수익성이 있는 아파트 규모에만 개발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90가구가 살고 있는 단독주택 지역이 아파트단지로 재개발될 경우 네배가 넘는 3백62가구가 입주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원주민의 입주능력을 무시한 재개발도 마구잡이개발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자료에 따르면 재개발 사업의 가옥주 재정착률은 30%에 불과하다. 결국 입주권을 팔고 밀려난 원주민들을 소화하기 위해 도시 외곽에 또 다른 임대주택을 개발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경원대 이창수(도시계획과)교수는 "주택보급률 확대 차원에서 장려한 다세대·다가구 건설이 주차전쟁을 야기했듯이 인프라 개선 없이 행해지는 개발은 도시를 망가뜨리면서 땅주인과 업자에게만 이익을 주고 있다"며 개발이익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도록 제안했다.

◇난개발 부추기는 당국=서울시가 계획도시로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양천구 목동 일대는 지금은 '무계획의 도시'로 전락하고 있다. 넉넉한 기반시설과 저밀도 아파트 단지로 쾌적한 환경을 자랑하던 이곳은 최근 상업지구에 들어선 주상복합건물 때문에 대표적인 난개발 지역으로 꼽힌다. 서울시 관계자는 "목동 상업지구는 원래 주민을 위한 편익 공간이었기 때문에 도시계획상 초고층 건물은 예정돼 있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건축허가를 내준 구청 측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당하게 용적률을 적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행정기관끼리 손발이 엇갈리는 현상은 허술한 법규 때문이다. 목동 개발 초기 도시계획법은 특정 지역을 상업지구 등 특정 용도로 지정할 뿐 건물 높이를 규제하는 내용이 빠졌던 것이다. 주거환경보다 지역개발을 우선하는 일선 구청들은 이러한 맹점을 이용해 결과적으로 마구잡이개발에 앞장선 셈이 됐다. A구청 관계자는 "지역 개발과 관련한 주민 민원은 표와 직결되기 때문에 민선 구청장으로선 무시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털어 놓았다.

◇앞뒤 안맞는 규제와 엉성한 제도=도심 마구잡이개발이 계속되자 서울시는 2년 전 4대문안의 용적률을 대폭 제한했다. 상업지구에 건물을 지을 때 8백%였던 용적률을 6백%로 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사업성이 떨어지자 업자들은 기반시설 투자를 외면했고 이는 도심환경 악화로 이어졌다.

중구 순화동 M빌딩의 경우 지하 7층·지상 25층 짜리 건물은 들어섰지만 환경개선 차원에서 계획됐던 인근 서소문 공원과 연계 도로 건설은 이뤄지지 않았다. 주변 지역 전체를 종합적으로 아우른 도시계획이 없었던 까닭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서울이 마구잡이개발의 심각성을 되돌아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서울시가 도시정책의 기조를 '개발'에서 '관리'로 선회한 것은 2000년 7월 '서울 난개발 방지 도시계획' 조례를 만들면서부터다. 이전에는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으로 규제해 왔다.

그러나 도시계획법은 용도지정만 할 뿐 용적률 등 구체적인 규제 기준을 마련하지 않아 갖가지 편법이 판치는 빌미를 제공했다. 한마디로 도시와 건축이 따로 놀아 주택가 곳곳에 나홀로 아파트가 생겨났다.

시정개발연구원 이희정 박사는 "2000년 6월부터 서울시는 2백곳에 대한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했지만 독일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지역별 특성과 유형이 매우 단조로운 편"이라며 "회를 뜰 땐 다양한 칼이 필요한데 서울은 부엌칼 하나만 사용하는 격"이라고 밝혔다.

심재우·백성호·김필규 기자

jw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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