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납품단가 개입 논란

정부 개입은 시장 자율조정 기능 훼손시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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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정부가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납품단가 후려치기, 기술 탈취 등 불공정거래 행위를 특별조사하기로 했다. 조사 배경에는 대기업은 사상 최대 이익을 내고 있는 반면 중소기업의 수익성은 악화되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행위를 바로잡아 갈수록 악화되는 대·중소기업 간 격차를 개선하겠다는 것이 조사의 취지라고 한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그럴듯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첫째로 대·중소기업 간에 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생산성 격차 때문이다. 1980년대에는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생산성 증가율이 높았으나 90년대 이후 기업 규모가 클수록 생산성 증가율이 높아졌고 최근에도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은 대규모 구조조정과 연구개발 투자로 생산성과 수익성이 급격히 높아졌지만, 중소기업은 혁신과 구조조정이 지연돼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낮아짐으로써 격차가 벌어졌다.

둘째로 일부 대기업이 최대 이익을 내고 있지만, 경제 전반으로 파급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 경제구조 변화와 관련 있다. 중소기업의 대기업 납품액 비율은 2005년 52%에서 2008년 43.5%로 하락해 기업 간 연관관계가 축소되고 있다. 이것은 글로벌 경쟁에 노출돼 있는 대기업의 부품 조달이 국내 중소기업에 머물지 않고 해외 주요 부품업체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등장은 우리나라 부품 조달의 국제화를 가속화했고, 이로 인해 트리클다운(trickle down) 효과가 미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납품단가 문제와 관련해 염두에 둘 것은 납품계약이 사적 계약이라는 점이다. 생산원가가 높은 기업은 시장에서 생존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생산비용을 낮추고 품질을 높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납품단가나 거래조건에 개입하는 것은 시장경쟁을 통한 비용 절감과 품질 제고 등을 제약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부의 개입은 기업 간 자율적 위험분담 역할을 훼손함은 물론 궁극적으로 기술개발을 지연시키는 등 오히려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을 어렵게 할 가능성이 크다.

넷째로 최근의 납품단가 인하 현상은 중소기업의 영세화에 따른 가격경쟁과 무관치 않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기업 규모가 작고 2, 3차 하도급 기업으로 갈수록 납품기업 간 치열한 가격경쟁이 납품단가 인하를 초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1차 하도급 거래에서의 불공정거래를 경험한 중소기업의 비율은 28.2%인 반면, 2차 이하 하도급 거래에서 불공정거래 경험비율은 75.6%로 높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중소기업의 납품단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2, 3차 하도급 거래에서 발생하는 불공정거래의 원인과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하도급업체의 기술개발을 통해 가격·품질 경쟁력을 높이고 전문화·대형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정부가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 발생의 근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 정책 처방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납품단가 문제를 포함한 중소기업의 애로와 불만을 대기업에 대한 조사와 제재로 해결하려는 정책은 오히려 시장의 자율조정 기능을 훼손하고, 하도급 시스템 전반의 효율성을 저하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보다는 중소기업의 기술개발 능력 향상이나 중견기업화 등으로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중소기업 정책의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병기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