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선언을 넘어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개성있는 헤어스타일에 파격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그들 두 사람이 갑자기 만난다고 할 때 뭔가 큰일을 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純一郞)총리와 마주앉은 김정일(金正日)위원장 옆에 통역말고는 강석주(姜錫柱) 외교부 제1부부장 한 사람만 배석한 것을 보고 뭔가 되는구나 싶은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는 북한의 대표적인 실용주의적 국제파요, 온건파다.

과연 2시간반의 짧은 정상회담의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일본인 납치에 대한 金위원장의 사과는 북한의 태도의 1백80도 전환이다.북한은 일본인 납치 주장은 북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부인해 왔다. 고이즈미 총리는 金위원장의 사과를 받은 뒤 국교정상화 교섭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개성파 지도자들의 결단과 결단이 마주쳐 빚어낸 큰 외교적 성과다.

앞으로 갈길은 멀다. 당장 고이즈미 총리는 납치됐던 일본인 8명의 사망 확인이 일본인들에게 준 충격을 달래는 정치적인 과제를 안고 있다. 사과 한마디 들었다고 그렇게 쉽게 국교정상화 교섭에 합의했느냐는 유가족들과 정치권 일각, 그리고 일부 여론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평양선언이 실행되는 경우에도 일본이 차지할 이득은 그렇게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북·일 관계가 대결에서 협력관계로 돌아서면 일본에 대한 북한의 위협이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일본인이 다시 납치되거나 북한의 괴선박이 일본 해안에 출몰하는 일은 없어진다. 그 대신 일본은 경제협력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에 수십억달러의 지원을 해야 한다.

반면에 평양선언의 정신과 분위기는 북·미 관계와 동북아시아 정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고이즈미 총리도 평양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동북아시아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데 기여해 지역안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을 보였다. 金위원장이 미사일 개발 동결을 무기한 연장하겠다고 밝힌 것은 특히 고무적이다.

金위원장이 핵문제에서는 국제적인 합의를 준수하겠다는 원론 수준의 말을 하는 데 그친 것은 양보의 상대를 미국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金위원장은 일본 총리와의 회담과 평양선언을 통해 미국에 러브콜(Love call)을 보낸 것이다. 그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북한이 미국과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북·일 정상회담은 타이밍이 절묘했다. 미국의 공격준비에 이라크가 떨고 있는 지금 북한 역시 "다음은 북한"이라는 정체 모를 관측에 불안해하고 있다. 북한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고, 특히 미국의 관심이 가장 큰 미사일실험 동결을 연장한다고 밝힘으로써 조지 W 부시 정부에 대북 강경자세를 완화할 구실을 제공했다.

평양선언 이후 북한의 대외관계는 두개의 궤도를 따라 전개될 것이다.

하나는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인데 아마도 경제협력의 액수를 둘러싸고 상당한 진통을 겪을 것이다.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납치 피해자들의 납치와 사망경위, 북한에서의 생활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일본 국내 여론의 요구도 수교교섭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럴수록 고이즈미 총리의 정치력이 기대된다.

다른 하나의 궤도는 평양선언에 자극을 받고, 또 어쩌면 고이즈미 총리의 적극적인 중재로 북·미 대화가 예상보다 빨리 재개되는 것이다. 지난 6월 서해교전으로 취소된 미국의 특사 방북이 실현되면 金위원장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한 핵시설 사찰을 내년 봄까지는 실시하자는 미국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수용할 가능성도 있다. 실리를 위해 국가에 의한 민간인 테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한 북한이다.

평양선언은 한반도문제 해결에 큰 물꼬를 텄다. 고이즈미 총리에게는 그럴 만한 정치적인 동기가 있고 金위원장에게도 경제적·생존전략적인 동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남북협력의 등을 떠밀고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노선을 수정하는 것이라면 두손 들어 환영할 만한 동기들이다.

金위원장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북·일 간의 가깝고도 먼 관계를 20세기의 유물로 만들자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양선언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도쿄에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