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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사법부가 함께 사는 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워싱턴DC에 위치한 미국 연방 대법원 법정의 법대엔 아홉개의 의자가 일렬로 놓여 있다. 연방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사건을 심리하거나 판결을 선고할 때 앉는 자리다.

그러나 이 의자들은 형태와 색깔만 같을 뿐 높이는 제각각이다. 새 대법관이 결정되면 그 사람의 체형에 맞춰 의자를 제작하기 때문이다. 현재 놓여 있는 의자들 중에선 대법관 서열로는 끝에서 둘째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것이 가장 높다. 대법관직을 퇴임할 때는 재직 기념으로 이 의자를 집에 가져가 자자손손 '가보(家寶)'로 간직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법원도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수가 13명(재판에 참여하지 않는 법원행정처장 제외)이어서 의자 수가 많을 뿐이다. 굳이 다른 점을 든다면 한국은 의자 높이까지 똑같고 대법관들이 퇴임할 때 이를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장을 포함해 재판관이 9명인 헌법재판소도 대법원과 마찬가지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명예·권위의 상징인 대법원장의 좌석이 클 법한데 중앙에 앉는 것 이외에 일반 대법관들과 차이가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재판에 임해선 다를 수 없다는 평등의 뜻이 담겨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최근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불러내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빚어졌다. 국회 법사위 3당 간사회의에서 증인 채택에 합의하자 사법부는 물론 변호사단체 등이 반발하고 나섰다. 법사위 소속 의원들은 "입법부 경시 풍조를 바로잡고 국회 위상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라며 "법관 인사제도와 대통령 사면권 등 현안에 대해선 사법부 수장이 직접 답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대법원과 헌재측에선 "국정감사의 대상은 행정업무지 재판업무가 아니다. 선진 외국에서도 사법부 수장을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시킨 전례가 없다"고 맞섰다. 급기야 국회의장이 중재에 나서 "사법부의 독립 등과 관련된 사안"이라며 신중한 추진을 권고했고, 결국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는 대신 질의에 대한 '총괄 답변'을 듣기로 매듭지어졌다.

하지만 이 문제는 수면 아래로 잠복했을 뿐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른다. 의원들이 '국회 위상 제고'를 명분으로 내걸고 있으나 따지고 보면 사법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16대 국회 들어 현역의원 18명이 선거법위반 혐의로 기소되고 다른 범죄 혐의로 기소돼 처벌 받은 국회의원이 17명에 이른다. 특히 상당수 의원들이 선거사범 처리의 형평성 문제를 지적해왔다. 국민 사이에서도 '유전무죄(有錢無罪)'니 '유권무죄(有權無罪)'니 하는 말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사법부 수장을 국감장에 세워 '호통'치는 게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하는 묘약일 수 없으며 입법부의 위상을 높이는 길은 더더욱 아니다. 법원이 국회의장을 법정 증인으로 소환한다고 해서 사법부의 위상이 올라가겠는가. 국회가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을 불러 앉힌다면 그들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에 전념하기 어려울 것이다.

2000년 11월의 미 대통령선거에선 플로리다주의 몇몇 선거구에 대한 재검표를 둘러싼 시비로 한달여간의 우여곡절 끝에 연방 대법원이 당선자를 결정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와 관련해 윌리엄 렌퀴스트 연방대법원장은 "법원이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기를 바랄 정도로 선거에 개입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정치권과 사법부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에 대한 단초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가급적 개입하지 말고 의원이나 법관으로서의 제 역할을 해 낼 때 입법부나 사법부의 위상은 저절로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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