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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1) 좌익에 손을 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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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대구에 주둔했던 6연대 내부로도 좌익들이 대거 침투했다. ‘대구 폭동’ 이후 검거 열풍에 쫓긴 좌익들이었다. 그들은 여수와 순천에서 14연대의 반란이 벌어지자 그 틈을 이용해 조직적인 반란을 꾀하곤 했다. 다행히 그들의 세력은 널리 미치지 못했다. 곧 출동한 군과 경찰에 의해 진압됐다. 군사(軍史)에서도 대구 6연대의 반란은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 폭동에 이어 여수와 순천의 14연대 반란 사건과 대구 6연대 반란은 분명히 흐름을 같이하는 군대 내부 좌익계의 발호였다.

바다에서도 일이 벌어졌다. 48년 5월 통천정(通川艇)과 고원정(高原艇)이 북으로 넘어간 사건이었다. 통천정은 5월 7일 주문진항을 떠나 38선 경계 임무를 마치고 묵호로 귀항하던 중 좌익계의 선상 반란에 직면했다. 정장(艇長)인 김원배 소위 등을 사살한 좌익 반란 병사들은 곧바로 배를 끌고 원산으로 북상했다. 목포에서 묵호로 전속 배치됐던 고원정의 월북도 같은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해 6월에는 대전정(大田艇)의 월북 기도 사건이 있었고, 그 다음해 5월에는 특무정이었던 제508정이 월북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들 사건이 벌어지는 유형은 대부분 같았다. 해군 내부에 좌익으로 숨어들었던 병사들이 상관을 사살한 뒤 월북을 기도하는 방식이었다.

미 군사고문단장이었던 윌리엄 로버트 준장의 전용 요트마저 북으로 끌려간 사건도 벌어졌다. 49년 8월의 일이었다. 역시 좌익에 의해 요트가 없어졌던 것이다.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식이 중앙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렇게 정부가 정식 출범했음에도 군을 비롯한 곳곳에 침투해 암약하던 좌익이 주동이 돼 벌인 소요 사태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갓 출범한 대한민국의 험난한 상황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연단에 오른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표정이 굳어 있다. [중앙포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바람에 해군 특별정찰대 20여 명이 북한의 몽금포에 로버트 장군의 요트가 끌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습작전을 벌여 빼앗아 왔다. 나중에 이 요트를 되찾아 온 사건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논란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그 사건의 본질이 좌익의 준동에 대응했던 우리 군의 행동이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군에서는 이런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군은 그만큼 좌익이 활개를 치는 분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뒤에 겨우 출범한 신생 대한민국의 앞길은 그렇게 험난했고, 좌익이 대량으로 숨어들었던 군대에는 그보다 훨씬 거센 풍랑이 몰아닥칠 기세였다.

어쨌거나 군이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며, 대한민국을 지키는 튼튼한 보루로서 그 작용을 제대로 할 것인가를 따져보는 계기는 여수와 순천을 배경으로 벌어진 14연대 반란 사건을 통해 만들어졌다.

나는 여수가 마지막으로 진압군에 의해 평정을 되찾던 시점에 서울로 되돌아 왔다. 48년 10월 말이었다. 광주에서 C-47 수송기 편에 몸을 싣고 김포에 도착할 때는 가을 저녁 무렵이었다. 이미 쓸쓸한 가을의 기운이 차갑게 맴돌고 있었다.

여수와 순천의 반란 현장에서 막 돌아온 나는 군대 내부에 숨은 좌익의 동향에 계속 주의를 기울였다. 현지에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각 지역 연대에서 올라오는 각종 정보를 덧붙여 군대 내부에 숨어든 좌익이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뿌리를 내린 것인지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서울에 돌아와 보니 제주 4·3 폭동에 이어 터진 여수와 순천의 14연대 반란 사건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특히 군 지도부를 비롯한 행정당국의 지도층 모두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신생 대한민국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 눈치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좌익이 책동한 반란은 대한민국에는 일종의 ‘행운’이었다. 그 수많은 생령(生靈)이 목숨을 빼앗기는 참혹한 사건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신생 대한민국이 좌익의 발호에서 벗어나는 커다란 전기(轉機)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중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남한 내부의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남로당도 제주 폭동과 14연대 반란 사건이 벌어진 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우발적이면서 일시적인 반란 사건으로 소기의 효과는 거둘 수 없었던 반면에 부작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경찰을 비롯한 우익 인사와 가족·친지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상으로 좌익의 잔혹함은 대한민국 전역에 알려졌고, 좌익이 군 내부까지 침투했다는 경각심을 국민 모두에게 일깨워줌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철저한 대응에 나서도록 했기 때문이다.

나는 군 정보국장 신분이었다. 군대 내부에 숨어든 좌익을 척결하는 책임자였다. 따라서 그 심상치 않은 작업은 내게 맡겨졌다. 그런 기회는 곧 닥쳐왔다. 군대 내부 남로당 조직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보고 있을 무렵, 이응준 육군 총참모장이 신상철 헌병 사령관과 나를 자신의 안암동 자택으로 불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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