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서소문 포럼

‘불굴의 의지’의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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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 몇 주 새 일어난 미국의 움직임은 작계 그대로다. 연합 해상훈련의 전력(戰力)은 1976년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당시 미국이 전개한 규모를 웃돈다. 훈련은 복합적이다. 바다와 공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망라됐다. 오키나와 주둔 RC-135의 한반도 정찰은 5월 이래 이뤄지고 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진수(眞髓)는 이것이 아니다. 훈련의 횟수다. 한·미는 매달 연합훈련을 실시할 계획이다. 북한은 주변 훈련에 팔짱만 낄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 외부의 위협을 먹고사는 병영국가다. 대비 태세를 갖추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등화관제나 방공호 훈련이든 맞불 기동훈련이든.

팀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이 이를 실증한다. 1976~93년(92년 제외) 진행된 한·미의 연례 야외 기동훈련 말이다. 항모가 동원됐다. 참가 병력이 많을 땐 20만 명이나 됐다. 서방 진영 최대의 훈련이었다. 그러나 TS훈련은 북한에 주적(主敵)이었다. 미국의 핵전쟁, 침략전쟁 연습으로 받아들였다. 히스테리 반응을 보였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도 1차 TS훈련이 직접적 원인이다. 김일성은 고통을 토로했다. “적들이 TS훈련을 할 때마다 우리는 매번 노동자들을 군대로 소집해 대응해야 하며, 이 때문에 1년에 한 달 반 정도 노동력에 차질이 생긴다.” 84년 호네커 동독 서기장과의 회담에서다. 그뿐이겠는가. 모든 부대의 맞대응 훈련으로 날린 비용은 엄청났을 것이다. TS훈련이 북한을 망가뜨렸다는 분석은 설득력을 갖는다. 미 레이건 행정부의 ‘스타워즈’ 계획인 전략방위구상(SDI)이 소련의 국력을 소진시킨 것과 한가지다. 한·미가 연합훈련을 매년이 아닌 매달 갖겠다는 데는 불굴의 의지(Invincible Spirit)와 TS훈련의 정치학이 함께 작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장 내정자가 90년대 국방정보국장일 때 “그들은(북한은) TS에 미친다”고 한 그 집단기억 말이다.

여기에 새 대북 금융제재가 시작된다. 북한식 표현은 계단식 제재다. 금융제재의 표적은 북한 지도부다. 이번엔 방법도 진화했다. 미국이 제재 대상을 지정해 제3국 금융기관에 통보하면 스스로 알아서 불법자금을 동결하는 스텔스 방식이다. 2005년처럼 특정 은행을 공개 지목하지 않는다. 해당국의 반발과 자금 인출 사태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다. 새 방식하에선 해외 금융기관의 협조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정부 당국자의 설명이 흥미롭다. “미국의 금융 제재는 개미굴에 물을 집어넣는 것과 똑같다. 익사하든지 기어 나오든지 둘 중 하나다.”

전임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부정(否定)했던 오바마 행정부가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작성한 작계 궤도에 올라선 것은 아이러니다. 수사(修辭)도 그렇다. “잘못된 행동에 보상하지 않는다”(부시)에서 “잘못을 깨닫게 해주겠다”로 바뀌었다. 클린턴 행정부 때의 북한 다루기 교훈을 간직한 인사들이 행정부 핵심 라인에 포진한 것과 맞물려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북한 비핵화의 진전을 끌어내기 위한 ‘함포 외교’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외줄타기의 정권교체로 내달을 것인가. 현재로선 미국의 출구전략을 가늠키 어렵다. 문제는 한·미의 전략적 눈높이 조율이다. 그것이 엇가면 동맹에 금이 간다. 북한의 강경 혹은 유화적 이간책에 놀아날 수 있다. 상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선 우리 자체의 현실적 출구전략은 불가결하다. 의지도 필요하다. 천안함 사건의 후폭풍은 이제부터다.

오영환 외교안보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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