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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자매의 '찬란한 슬픔' 여성적 감수성의 백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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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작별'은 평범한 제목만큼이나 평범해 보이는 영화다. 스크린을 압도하는 특수효과도, 눈을 즐겁게 하는 액션도 없다. 화려한 볼거리에 익숙하다면 TV 단막극을 보는 듯한 심심함마저 느낄 수 있다.

소재도 평이하다. 부모를 잃고 아옹다옹 다투며 성장해가는 자매가 주인공이다. 언니는 동생을 어머니처럼 돌보고, 철부지 동생은 언니에게 투정을 늘어놓는다. 카메라도 차분하게 돌아간다. 과거와 현재를 왕래하는 영상이 새로울 게 없고,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도발적 화면도 없다.

'작별'의 매력은 바로 이 평범함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듯한 얘기, 주변에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소재를 다루되, 이를 안정된 화면 속에 녹여내는 정직함이 살아 있다. 허황된 줄거리로 충격을 주는 과장법 대신 삶의 속안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직설법을 택했다.

또 인생의 구석구석을 따뜻하게 포용하면서 윤기 있는 에피소드를 풍부하게 끼워넣어 삶의 외투만 건드리고 지나가는 TV 드라마와 뚜렷하게 구분된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작별'은 비극적 영화다. 돌발적 교통사고로 부모와 동생을 일시에 잃는다는 건 분명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다. 그러나 '작별'은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곳곳에 상큼한 웃음을 심어놓았다.

17살의 언니 메메(잉그리드 루비오)와 여덟살의 동생 아네타(히메나 바론·아역). 댄서를 꿈꿨던 미녀형의 언니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다. 그래도 그는 동생에겐 유일한 보호자. 신체 결함으로 남자 앞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아픔을 숨기면서 동생의 응석을 받아준다. 동생과 언니는 서로를 '다리 병신''안경 괴물'로 놀려대다가 금방 깔깔대며 장난을 친다. 하지만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둘 사이의 갈등이 발생한다. 언니의 간섭에 동생의 불만이 커지고, 이성 문제를 둘러싼 다툼도 증폭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여성 감독 에두아르도 미뇨나는 이들 자매의 마찰과 대립을 촘촘한 그물로 낚아챈다. 유부남의 애를 유산하고 사랑에도 실패해 술과 담배에 의존하는 메메, 육체·정신적으로 성숙해 자기 세계를 키우려고 하는 아네타(프로렌시아 벨토티)의 변화를 섬세하게 추적하는 것이다.

자칫 신파적 최루극에 그칠 수 있는 영화를 탄탄한 휴먼 드라마로 잡아두는 요소는 크게 두가지다. 첫째, 잉그리드 루비오의 연기다. 겉으론 발랄한 척 하면서 속으론 외로움에 지친 메메의 이중성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둘째, 효과적인 상징물이다. 식구 모두가 화목하게 지냈던 어린 시절의 가족 앨범이 두 자매를 끈끈하게 연결시키고, 두 자매의 상처를 달래주었던 등대가 자주 등장하며 암청색 절망을 코발트색 희망으로 돌려놓는다. 원제도 스페인어로 남쪽 등대를 뜻하는 'El Faro del Sur'다. 결국 암에 걸려 사망한 언니가 동생에게 남겨준 앨범 속에 숨겨진 편지가 전달하는 찬란한 슬픔이란….

이렇듯 '작별'에는 여성적 감수성이 일렁인다. 달콤한 멜로, 격정적 사랑은 없지만 자매애·가족애를 일깨운다. 남에 대한 배려가 뭔지도 일러준다. 스페인·아르헨티나·우르과이를 돌며 찍은 풍광과 전편에 울려퍼지는 애잔하고 흥겨운 음악도 영화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27일 광화문 시네큐브(02-2002-7770)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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