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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이슈] 강경파 '정면 돌파'… 잠깐 인기, 긴 후유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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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강경파의 논리는 선명하고 화끈하다. 비굴하게 타협하느니 장렬히 산화하자는 식이다. 복잡한 현실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강경파의 주장은 듣는 이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반면 온건파의 논리는 우유부단하게 들릴 수 있다. 이쪽과 저쪽에 저마다 일리있는 측면이 있다고 하는 식이니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기 어렵다. 사이비로 몰릴 때도 있다. 강경파가 명분 싸움에서 온건파를 손쉽게 누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누가 옳은지의 판정이 뒤바뀌는 경우는 허다하다. 숭실대 강원택(정치학)교수는 "정치의 패러다임이 달라졌는데 아직까지 대화와 타협을 정치적 야합으로 간주하는 민주화투쟁 시대의 유산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 강경의 부작용=강경파는 반대파의 거센 저항에 부닥칠 때 우회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문제는 뒤끝이 나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말 정리해고 도입 등을 골자로 한 노동법 개정 협상이 야당의 반대로 지지부진하자 "연내에 반드시 처리하라"고 여당인 신한국당에 지시했다.

결국 여당은 새벽 날치기를 감행했다. 이는 야당뿐 아니라 전 국민적 저항을 받아 결국 재처리 절차를 밟았다. 조기 권력누수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58년 자유당 정권의 국가보안법 날치기 파동이나 79년 박정희 정권의 김영삼 의원 강제 제명 사건 등도 강경이 권력의 몰락을 재촉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강경 대 강경의 대결보다 협상과 타협이 유리한 결과를 끌어낸 경험도 많다. 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조병옥 대표는 자유당과 선거법 협상을 벌여 투.개표 시 야당 참관인 입회를 얻어내는 대신 자유당이 요구한 언론통제 조항을 수용하는 합의문을 이끌어냈다.

이에 자유당과의 협상자체를 반대하던 민주당 선명.강경파는 "언론자유 침해를 허용해 야당이 망했다"며 펄펄 뛰었고 결국 조병옥씨는 대표직을 내놔야 했다. 그러나 그해 선거에서 민주당은 79석을 얻는 약진을 기록,협상안이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뒤늦게 판명됐다.

전두환 정권은 87년 4.13 호헌 조치로 국민 저항에 부닥치자 한때 군 투입까지 검토했으나 결국 국민의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이는 온건론을 채택했고 그 결과 합법적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 강경.온건의 뿌리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강경파와 온건파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강경파에 이상주의자가 많다면, 온건파엔 상대적으로 현실주의자가 많다. 해방 후 좌우익 대립 속에서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하다고 본 이승만의 노선은 현실주의였다. 김일성과의 정치 담판을 통해서라도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김구는 이상주의에 가까웠다. 두 사람은 건국노선이란 이념적 문제로 갈등한 경우다.

강경 노선이 끔찍한 결과를 낳은 적도 있다. 조선 인조 때 청나라가 조선에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당시 조정은 일전불사를 외치는 강경파(김상헌)가 청과 화친을 주장하는 온건파(최명길)보다 우세했다. 오랑캐와는 타협할 수 없다는 '존화(尊華)사상'이 국제정치의 현실논리를 깔아뭉갰다. 강경파가 주자학의 이상주의에 집착하면서 조선은 병자호란이라는 참변을 겪었다.

◆ 강경은 강경을 부른다=한쪽의 강경파가 목소리를 높이면 상대편에서도 강경파가 주도권을 쥐게 돼 갈등의 악순환이 벌어진다.

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며 종신집권체제를 구축하자 야당에서도 온건노선이 자취를 감추고 김영삼이 주도하는 강경 투쟁노선이 당권을 장악했다. 한때 이철승이 중도통합론을 주장하며 온건파의 목소리를 냈지만 "독재권력과는 타협할 수 없다"는 분위기에 파묻혔다.

얼마 전 작고한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이철승씨와 야당을 함께하면서 자주 부딪쳤고 그의 중도통합론에 반대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사람만큼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도 드물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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