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거래물량 평상시의 10배 가락시장은 지금 전쟁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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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0면

12일 오전 4시30분.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의 최고참 경매사 이영신(45·중앙청과 영업2본부장)씨는 잠자리에서 어렵사리 일어났다. 벌써 19년째 청과 도매에 몸을 담고 있는 그이지만 이날따라 몸이 천근처럼 느껴졌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하루에 처리해야 할 경매물량이 산더미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출근은 한 시간 앞당기고 퇴근은 두세 시간 늦췄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우리 회사(중앙청과)에서 다루는 배가 하루에 2천상자 정도였지만 요즘에는 1만5천상자도 넘어요. 사과도 4천상자에서 7천8백상자로 늘었습니다."

그는 추석 사흘 전인 18일까지 단 10분도 개인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에 경매되는 사과·배가 연중 최고 수준에 달하기 때문이다.

산지에서 올라온 햇과일이 가락시장에서 중간도매상에게 넘어가 소비자의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사흘 정도 걸린다. 따라서 추석 연휴 사흘 전까지는 사과·배의 거래물량이 평상시의 열배까지 치솟는다.

그가 몸담고 있는 도매법인 중앙청과는 가락시장 거래물량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가락시장이 서울시 청과물 소요량의 절반 가량을 취급하고 있으니 서울에 유통되고 있는 청과물 열개 중 한두 개는 이씨의 손을 거치는 셈이다.

오전 6시.

동료 경매사 다섯 명과 함께 현장으로 내려간 그는 중간도매인들의 재고량과 새로 들어온 물량, 경쟁업체의 움직임 등을 확인한다.

사과·배는 보통 산지에서 오후 6시쯤에 출하돼 다음날 오전 1~2시쯤 가락시장에 도착한다. 도매법인은 산지 농민이 팔아달라고 부탁한 상품을 경매에 붙여 중간도매상들에게 넘긴다. 대신 거래가격의 4%를 수수료로 받고 상자당 1백50원씩 하역비를 받는다.

오전 8시30분.

"에~오다이 특자 2만3천,4천…."

가락시장 50여평의 공간에서 이씨가 '암호'같은 말을 연신 해댄다.'자~사과 51~60개 들이 특품이 2만3천원,2만4천원'이란 뜻이다.

이씨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60여명의 중간도매상들도 손놀림이 빨라진다. 중·하품 경매가 진행될 때는 거의 주문을 내지 않다가 특품 경매 때는 마구 주문을 내기도 한다.

"태풍 등의 영향으로 특품이 크게 줄었습니다. 중간도매상들이 특품을 서로 사려고 야단이지요. 예년엔 사과 특품(15㎏)과 상품의 가격차가 1만5천원 정도였지만 요즘엔 2만원 이상으로 벌어졌습니다."

이날 사과·배 경매는 오후 3시30분까지 이어졌다. 이달 초까지만 해도 물건이 많지 않아 오전 9시30분쯤이면 끝나던 경매가 이날은 물량이 많아 일곱시간 정도 진행됐다. 추석 4~5일 전에는 오후 7시는 돼야 경매가 끝난다. 물량이 갈수록 많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오후 3시30분.

그는 산지에서 청과를 출하한 농민들에게게 경매 결과를 통보해줬다. 그 사이에 그의 휴대전화는 1분이 멀다 하고 연신 울려댔다.

"산지에서 경매 결과를 묻는 전화가 하루에 60~70통씩 오곤 합니다."

올해 사과 품질은 지난해보다 떨어졌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아오리는 끝물이라 과도하게 숙성돼 품질이 나쁘다고 한다. 홍로(붉은 사과)는 꽃이 필 무렵 기후가 좋지 않아 기형성 수정이 많은 데다 한참 익을 때에 비가 많이 와 착색이 제대로 안됐다고 한다. 배도 마찬가지다. 조생종인 원황과 화산은 끝물이라 무른 제품이 많다. 만생종인 신고는 아직 나올 때가 아니다. 그런데도 약품처리로 출하를 앞당기다 보니 씹히는 느낌이 좋지 않고 당도도 떨어진다고 한다. 배 꽃이 필 무렵 냉해를 입었기 때문에 윗부분이 기형적으로 튀어나온 '숫배'도 많다고 한다.

농업관측정보센터가 지난 2일 조사한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사과의 크기와 색깔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당도가 떨어진다. 배도 모양과 당도가 지난해보다 크게 나빠졌다는 것이다.

이씨는 추석이 예년보다 일찍 찾아오느냐 늦게 찾아오느냐에 따라 사과·배의 소비량과 가격이 '춤춘다'고 들려줬다. 추석이 10월 1일 이후면 추석 때 사과·배의 소비량이 한해 전체 소비량의 30%를 차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9월 중순 이전에 추석이 오면 이 비율이 25%로 떨어진다는 것이다.사과와 배가 9월 중순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출하되기 때문이다.

오후 5시.

내일 반입물량이 얼마나 될 것인지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올해는 태풍 등의 피해로 물량이 지난해보다 20% 가량 줄었습니다. 따라서 가격이 20% 상승할 것 같습니다. 가락시장에서 중간도매상에게 파는 가격이 한 상자에 4천~5천원 정도 오를 것 같아요. 지난해보다 질이 떨어진 상품이 비싸게 팔리는 셈이지요."

이씨의 경쟁상대는 할인점이다.주요 할인점들이 도매시장을 거치지 않고 산지와 직거래하면서 사과와 배를 팔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까지만 해도 과일의 80% 이상이 도매시장을 거쳤습니다. 요즘엔 도매시장을 안거치고 산지와 직거래하는 비율이 60%에 이를 정도로 역전됐지요."

'배는 전라도, 사과는 경상도'하는 식의 전통적인 구분은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사과는 경상도에서 70%, 배는 전라도에서 25% 가량이 생산되고 있지만 신흥 명소가 급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는 평택·안성·천안산의 명성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충주 사과도 이름을 날리고 있지요. 새로운 재배방법을 시도하고 품질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어 중간도매상들에게 인기입니다."

오후 8시.

"하루에 두세 시간씩 큰 소리로 말하니 목에 무리가 갑니다. 저녁 숱가락을 놓자마자 잠자리에 들곤 합니다. 뚱뚱한 경매사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지요. "

그는 헬스클럽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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