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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0) 좌익의 온상이었던 국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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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그러나 내 생각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심한 무엇인가가 당시 대한민국의 군 내부에는 남아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당시의 군은 제대로 돌아가는 조직이 아니었다. 상층 지휘부를 포함해 각급 부대 모두 ‘대한민국 수호’라는 뚜렷한 목표 아래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조직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렇다고 좌익이 흘러넘쳐 군기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군대라고도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 소지(素地)는 분명히 존재했고, 제때 손을 쓰지 못하면 그것은 점차 커질 기미도 보였다.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의 모습. 반란군은 우익 인사, 특히 경찰과 그 가족들을 집중적으로 살해했다. 이로써 좌우 세력 간에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학살극이 시작됐다. [중앙포토]

나는 여수와 순천에서 작전 상황을 여러 경로를 통해 파악하면서 그런 점을 충분히 느꼈다. 적을 앞에 두고도 일선의 지휘관은 제때 움직이지 않았다. 순천 진입을 앞두고 L4 경비행기에 올라탄 채 내려다본 진압군의 진영에서는 이상한 적막감이 느껴졌다. 지상에서 전해지던 소식을 통해서도 우리 군이 전투를 제대로 치르기에는 결정적으로 뭔가를 결여한 조직이라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직업이 군인이면 적 앞에서 분연히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란군이 코앞에 서 있는 상황에 닥쳐서도 군은 좀체 적극적으로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들어본 바로는 상관은 부하의 눈치를, 부하는 상관의 입장을 서로 저울질하는 분위기가 우리 군에 이미 농후하게 쌓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 이데올로기의 문제였다. 크게는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있는 이념과 사상의 상태, 좁게는 서로 어느 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인가를 숨죽이며 점검해 보는 기회주의적인 근성(根性)들이 그 안에 자리 잡았거나, 자리를 잡는 과정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결국 따져보면 모두 해방 뒤의 정국이 좌와 우로 크게 갈라지고, 북쪽에서는 사회주의를 표방한 정권이 착착 자리를 잡아가면서 남쪽에는 그 반대의 대한민국이 출범했다는 게 이유였다. 이리저리 둘러가려 해도 이미 이념적 성향에 따른 정치적 균열이 대한민국의 군대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따져보면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 반란 사건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남한 내에 이미 상당히 퍼져 있던 남로당 지도부 또한 이를 지지할 수 없었던, 충동적이면서도 돌발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조사된 바로는 애초 반란을 일으켰던 14연대에 속해 있던 장교 20명은 반란이 일어나던 당일 현장에서 대부분 사살됐다. 이 가운데 15명은 남로당 소속이었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서로 모르는 상태로 군대에 숨어들어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 지창수 상사 등 같은 좌익의 반란 주도 세력에 살해된 것이다.

남로당원으로 국방경비대에 숨어들어 14연대에 근무하던 좌익 장교 16명 가운데 김지회 중위만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 뿐 나머지는 모두 같은 좌익이자 남로당원이었을 반군 주도 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남로당 전라남도 지부도 14연대의 반란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상태다. 그렇다면 지창수 등 일부 14연대 하사관들에 의해 충동적으로 벌어진 반란이 여수와 순천을 피바람으로 몰아친 셈이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던 일이었다.

충동적이면서 감정적인 반란으로 인해 여수는 물론이고 순천에서도 극심한 살해극이 벌어졌다. 이들의 과격하면서도 무분별한 학살에 직면하면서 우익과 그 가족, 나아가 일반 피해자들도 피의 보복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거쳐 일어난 반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의 진압은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앞서 말한 대로 뭔가를 의식하면서, 제대로 적 앞에 나서서 공격을 펼치지 못하는 모습이 자주 나타나고는 했다. 군이 군으로 출발은 했지만, 뭔가 심각한 중병에 걸려 있다는 느낌을 주는 대목이었다.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이현상이 그때쯤 여수와 순천에 등장했다. 그는 전라남도 일대의 남로당 유격대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지리산 아래로 내려왔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나와 함께 1945년 12월 남한으로 내려왔다가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15연대장이 된 최남근 중령은 14연대 반란 진압을 위해 마산에서 순천으로 이동하는 길에 반군에 체포당하는 것처럼 위장해 당시 지리산에 숨어들어 있던 이현상 등 남로당 지도부와 접촉했다. 그는 이미 남로당에 발을 들여놓은 뒤 군에 숨어들어 국군의 연대장까지 올라가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중에 그 사실이 탄로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당시 국군은 그렇게 좌익의 치밀한 침투 공작을 받아 이미 제 기능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로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졌던 반란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대구에서, 해상에서, 그리고 전선의 곳곳에서 대한민국 군대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혼란의 양상은 겹겹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아주 심각한 현상들이 눈앞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제주도 폭동 사건은 그 아주 작은 시작이었고, 여수와 반란은 그를 조금 더 구체화한 연결고리에 불과했다.

국가 안보라는 튼튼한 밧줄로 한데 꽁꽁 묶여도 모자랄 군인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때의 상황은 그렇게 심각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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