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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前대통령의 '크라이슬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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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3면

1930년대 초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남 이승만 박사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기에 바빴다. 넓은 대륙을 이동하는 데 자동차는 필수품이었다. 우남은 20년대에 운전을 배워 능숙한 솜씨를 자랑했다.

문제는 핸들만 잡았다 하면 난폭 운전자로 돌변하는 것이었다. 차분한 성격과는 영 딴판이었다. 하지만 평생 무사고 기록을 세웠다.

34년의 일이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기 위해 뉴욕을 출발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된 프란체스카 여사는 비서 겸 타이피스트로 우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날도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우남의 과속·난폭 운전에 여사는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백주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신호등도 무시한 채 시속 1백40㎞를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두 대의 경찰 오토바이가 뒤따르기 시작했다. 시간에 쫓긴 우남은 차를 세우기는커녕 속도를 더 높였다.

쫓고 쫓기는 레이스는 우남의 승리로 끝났다. 정시에 프레스클럽에 도착한 우남은 숨쉴 여유도 없이 강단에 올라 능숙한 영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청중들은 연설에 매료된 나머지 수십 번 기립박수를 보내며 열광했다.

뒤따라온 경찰관들은 강연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씩씩거리면서 강연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나오기만 하면 단번에 체포하겠다는 기세였다.

그런데 이 경찰관들도 어느 새 우남의 열변에 빨려들어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연설을 끝내고 나오는 우남에게 두 경찰관은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만들어 보였다. 그리고 옆에서 따라나오는 프란체스카의 귀에다 "기동 경찰관 20년 만에 교통법규 위반자를 놓친 것은 단 한명뿐"이라며 "그 사람이 바로 당신 남편"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굿 럭 마담(부인, 행운을 빕니다)"이라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우남에게 운전을 배웠다. 그러나 남편과 달리 얌전하고 부드럽게 운전했다. 우남은 그에게 '실키 드라이버(비단같은 운전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우남은 해방 후 대통령이 된 뒤에도 가끔 핸들을 잡았다. 그러나 난폭운전은 여전했다. 李대통령은 한국전쟁 동안 피란민 속에 섞여 내려오는 인민군의 교란작전으로 우리 군이 곤경에 처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초 주한 미국대사를 불러 한국군과 미군이 함께 인민군 색출작업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한국군을 불신한 무초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부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우남은 "내 제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는 곧바로 흙탕물을 튀기며 지프를 몰고 무초를 향해 돌진했다.겁에 질린 무초는 李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손수 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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